“나부터 회초리를 맞아야”
“나부터 회초리를 맞아야”
  • 편집국 기자
  • 승인 2010.03.02 11:15
  • 호수 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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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기복

▲ 권기복
지난 2월 22일, 이명박 대통령은 제35차 라디오, 인터넷 연설을 통해 ‘졸업식 알몸 뒤풀이’와 관련해 “대통령인 나부터 회초리를 맞아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며 충격적인 교육의 현실을 언급하였다. 그날 오후에는 아산의 고등학생이 40대 장애자를 괴롭힌 인터넷 영상물이 공영 방송의 이슈로 뉴스를 탔다.

작금에 이르러 중 ·고등학교를 다니는 청소년뿐만 아니라 초등학생까지도 세상을 깜짝 놀라게 만드는 범죄 행위에서 동떨어져 있지 않다. 발걸음이 빈번한 거리마다 어깨에 힘을 주고 주름잡는 이들이 대부분 청소년들이다. ‘동방예의지국’은 아예 거론조차 하고 싶지 않다.

개개인을 존중하고 평등을 지향하는 민주사회의 한 시민으로서도 심기가 불편한 일이다. 물론 그들은 청소년들 중의 일부에 불과하다.
필자 또한 중학교에 재직하는 교사이다 보니 이러한 사회 현실에 부끄러움을 금할 길이 없다. 필자는 그러한 사회적 논란을 일으킨 학생이 없다고 자위할 처지가 아니다.

내 품을 거쳐 간 제자가 앞으로도 그러한 문제를 발생시키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으며, 나 또한 그들의 사회적 선배이기 때문이다. 우리 기성세대들이 모두 청소년들의 사회적 문제에 대하여 암암리에 동기나 원인 제공자인지도 모른다. 그러기에 나부터 회초리를 맞을 일이다.

이 대통령은 교육개혁을 통해 충격적인 교육 풍토를 바꿔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필자 또한 깊이 동감한다. 그러면서 교사와 어른, 영상 매체와 가정이 함께 노력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특히 교사들에게 ‘열과 성을 다해 제자 한 명 한 명을 더 보듬어 주기 바란다.’고 하였다. 학력 신장을 외치던 대통령이 인성 또한 그 못지않게 중요하다고 역설하기도 하였다. 지당하신 말씀이다. 한 마리보다 열 마리의 토끼를 다 잡을 수만 있다면 누가 마다하겠는가!

그러나 다 놓칠 우려가 있기에 몇 가지 대안을 제시하고자 한다.

첫째, 학교의 교칙이 엄격해야 한다.

필자도 체벌로 학생을 다스리는 방식에는 반대한다. 체벌 자체가 폭력이기에 체벌은 또 다른 폭력을 낳을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통계 수치를 내놓지 않아도 폭력을 당해본 사람이 더욱 폭력적이라는 것은 보편화된 이론이다.

그러나 교칙이 대부분 유명무실해지다보니 학교질서가 무너지고 있다. 때로는 인권적 문제가 거론되고 있는데, 한 학생의 인권을 제약하여 수많은 학생의 인권을 보장하는 것도 사회정의에 어긋나지 않는다고 본다.

둘째, 학교의 선도권이 인정되어야 한다.

중등학교는 민주시민, 세계시민으로서의 능력을 증진시키고, 사회적 질서와 규칙을 학습하여 바람직한 사회인을 육성함을 목표로 하고 있다. 그러므로 학교는 작은 예비 사회이다.

그런데 현재의 법으로는 교내에서 발생한 모든 사안에 대해서 학교의 선도권이 인정되지 못하고 있다. 때로는 교내에서 발생한 자잘한 학생 문제에 대해서도 선도적 차원의 문제 해결을 불법행위로 취급받고 있다. 예방적 차원만 선도행위를 하다 보니, 교사들은 그저 맥 빠진 잔소리꾼에 불과하다.

교내에서 발생한 학생 문제에 대해서는 사후에도 화합과 치유를 목적으로 하는 법적 조정 역할까지 인정해주던 예전의 통념이 적용되기를 바란다.

셋째, 교권이 확립되어야 한다.

교사는 동서고금을 통하여 권력과는 거리가 먼 직책이다. 또한 경제적 치부를 한 계급도 아니다. 그래도 공경의 대상이었고, 독립된 가치를 인정받는 사회적 위치에 있었다.

판사는 독립된 법적 심판을, 의사는 독립된 환자의 진찰과 치료를, 교사는 독립된 인간의 교육을 담당한다. 따라서 교권은 교사의 독립된 교육 가치를 인정해주는 데에서 출발한다.

사회적 인정 분위기가 성숙해질 때, 교육이 제 가치를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넷째, 학교에 대한 신뢰가 회복되어야 한다.

I. 일리치의<탈학교의 사회>(1971)나 E. 라이머의 <학교는 죽었다>(1982)가 오늘에 이르기까지 논란을 빚고 있지만, 학교 없는 교육은 초고속 인터넷 시대라 할지라도 존재 가치가 충분하다. 물론 고대 그리스 시대처럼 훌륭한 스승 밑에서 사유적 학습을 추구하던 아카데미를 그리워할지는 모른다.

그러나 현대의 엄청난 지식의 분량은 단 1인의 스승이 모두 채워줄 수가 없다. 각 분야에 전문적 지식을 갖고 있는 많은 교사가 필요할 수밖에 없는 연유이다. 기왕 필요로 하는 학교라면 신뢰를 주고받는 과정에서 그 역량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학교와 가정, 지역사회의 연계와 청소년 문화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교육은 가정에서 인성 중심으로, 학교에서 지식 중심으로, 지역사회에서 문화 중심으로 학습되어진다. 그러나 인성과 지식, 문화는 별개가 아니라 다 함께 작용하여 우리 사회에 그 현상이 나타나게 된다.

또한 학력 신장에만 내몰리고 있는 청소년들에 대한 이해와 대화가 필요하다.

우리 청소년들이 학력 향상을 위해 노력하면서 나름대로 그들만의 세계를 즐길 수 있는 기회와 바람직한 문화를 창출해 주어야 한다.

교육이 민주시민, 세계시민을 양성하고 바람직한 사회 정의를 구현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교권이 확립되고, 학교가 인정을 받아야 하며, 가정과 지역사회 및 정부 등은 깊은 관심을 가지고 적극적인 협조와 지원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이 대통령께서 “앞으로 직접 챙기겠다.”고 하셨는데, 이는 상당히 위험한 발상이다.

교육을 ‘백년대계’라 하는 이유는 채소밭에서 잡초를 뽑아내듯이 어느 한 순간에 개혁이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잡초마저도 훌륭한 약초로 키워야 하는 것이 교육이 아닌가!                               

<칼럼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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