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은 계곡의 은둔자 물까마귀
깊은 계곡의 은둔자 물까마귀
  • 편집국 기자
  • 승인 2010.07.05 13:15
  • 호수 52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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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병 상 /칼럼위원

 

▲ 박 병 상 /칼럼위원
산림이 우거진 계절, 깊은 계곡은 대낮에도 어둡고 서늘하다. 카메라 조리개를 활짝 열어도 셔터 속도가 느려 기념촬영 모드로 들어간 피사체들은 잠시 숨을 멈춰야 한다.

고개를 돌려 무당개구리가 어기적거리는 계곡을 바라보자. 가로 눕고 세로로 얹힌 바위마다 영겁의 세월 동안 두툼한 이끼를 허락하고, 사방에 물방울을 터뜨리며 내려가는 물은 맑고 차갑기 이를 데 없다.

잠시 계곡으로 내려가 배낭에 매달린 컵으로 떠 한 모금을 축이면 남은 산행에 기운이 솟는다. 가족과 함께라면 그늘에 앉아 과일을 깎아 먹고 일어서도 좋겠지.

잠깐. 과일껍질은 다시 배낭에 넣어야할 테지만, 가만히 물속을 들여다보자. 티 없이 맑은 물이지만 계곡은 수많은 곤충들을 거느린다. 자잘한 돌로 몸을 감싼 수서곤충들이 여기저기에서 고물거릴 것이다.

우리는 대개 거기까지다. 꼭 산꼭대기까지 올라가야 직성이 풀리니 어여차! 몸을 일으키지만, 때는 삼라만상의 생명이 만개하는 계절이 아닌가.

인간들이 등산로마다 얼마나 시끄럽든, 계곡의 물까마귀는 상관하지 않는다. 계곡 그늘에 앉은 인간들이 조용하기만 하다면 거리끼지 않는 물까마귀는 햇살 드문 계곡을 자그마하게 지배한다.

햇살 비추는 바위에 앉아 굴뚝새처럼 꼬리를 까딱까딱 올렸다 내리길 몇 차례, 이윽고 수면을 스치듯 어두운 계곡을 날며 맑은 물속 곤충의 동태를 살피는 물까마귀는 맨발을 담그고 두런두런 이야기하는 인간에 곁을 주지 않은 채 부지런을 떤다.

이야기를 멈추고 시선을 가무잡잡한 물까마귀의 동선을 따라가 보자. 수서곤충과 이따금 작은 물고기를 부리로 앙 물고 바위에 앉았다가 계곡 물을 차며 이내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물까마귀는 어쩌면 다 자란 새끼들의 먹성을 채우고 있을지 모른다.

넙적한 바위를 타고 흘러내리는 계곡물의 뒤쪽. 어두운 둥지를 빠져나온 어린 물까마귀들은 아직 물속이 낯선지 햇살이 비치는 바위에 옹기종기 모여앉아 어미와 아비가 연실 건네주는 강도래와 민도래의 애벌레와 버들치들을 게걸스레 먹어치우지만 머지않아 스스로 해결해야한다는 걸 눈치 채고 있을 것이다.

물가로 조심스레 내려앉아 작은 부리로 모래를 뒤져본다. 부화한 지 20여 일. 배와 가슴은 비늘과 같은 흰 무늬가 산재한 녀석들의 덩치는 어미 못지않아도 아직 어리다. 몸을 움츠린 채 바싹 붙어 앉은 새끼들은 불안하기 짝이 없다.

그늘에서 더욱 검게 보이는 진한 갈색의 제 어미 아비가 다가와야 비로소 날갯짓하는 녀석들은 아직 돌진하듯 수면을 스치거나 물속에 뛰어들어 버들치를 낚지 못한다.

여느 동물과 마찬가지로 계곡의 먹이를 택한 물까마귀도 먹이가 가장 많을 때 제 새끼를 낳았다. 겨울을 보낸 강도래와 민도래의 애벌레들이 눈이 녹아 늘어나는 유기물을 먹고 토실토실 자랐을 때 알을 부화시켰는데, 오염에 약한 수서곤충들이 사라지면 물까마귀도 품었던 너덧 마리의 새끼들을 건사하기 버겁다.

그렇다고 옆 계곡을 기웃거릴 수 없는 일. 수면을 스치듯 쏜살같이 돌진하는 이웃의 텃세에 혼비백산 달아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곤충이 동면에 들어가는 겨울이라면 동작이 둔한 버들치를 살얼음을 깨고 잡아먹으며 버틸 수 있지만 온갖 생명이 약동하는 계절에 굶주리다니. 굴삭기 굉음이 다가오는 계곡의 물까마귀는 내일이 두렵기만 하다.

사실 물까마귀는 계곡을 지배하는 게 아닐지 모른다. 새매나 솔부엉이와 같은 천적이 가까이 오지 않는 깊은 계곡에서 온몸을 어두침침하게 칠한 채 그저 수서곤충이나 만족하며 사계절을 은둔하는 건지 모른다.

물까마귀는 높은 산의 까마귀처럼 그 수가 줄어들기는 해도 아직 드물 정도는 아니다. 경쟁이 치열해졌을지언정 어둡고 깊은 계곡에서 자신의 지위를 잃지 않았다. 곧 어미 곁을 떠날 어린 물까마귀, 자연의 품이 아직 건강하다면 내년에 다시 만날 수 있겠지. 그때까지 용케 은둔하기를 계곡 밖에서 학수고대한다.

* 물까마귀 : 참새목(―目 Passeriformes) 물까마귀과(―科 Cinclidae)에 속하며 한국 전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텃새. 몸길이는 약 22㎝ 정도이며, 몸 전체가 흑갈색이고 다리는 은회색인데, 어린 새는 몸에 흰색의 얼룩무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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