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 1번지 종지리를 지킨다
독립운동 1번지 종지리를 지킨다
  • 허정균 기자
  • 승인 2011.03.05 03:07
  • 호수 55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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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갑수 선생 후손 김석중씨

▲김석중씨
서천 사람들 대부분 월남 이상재 선생과 김인전 선생은 잘 알아도 독립운동가 김갑수 선생에 대해서는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김갑수(金甲洙) 선생은 1894년 한산면 종지리 월남 이상재 선생 뒷집에서 태어났으며 1907년 상경하여 월남 선생 댁에 기숙하며 언더우드가 설립한 경신학교를 다녔다. 이 때 함께 공부한 이들이 2공화국 때 총리를 지낸 장면, ‘논개’라는 시로 유명한 시인 변영로 등이다.


21세 되던 1915년 그는 월남 선생의 권유로 중국 상해로 건너가 난양(南陽)대학에서 여운형, 서병호 등과 함께 수학하였다. 이 때부터 김갑수 선생은 조선인 유학생회를 이끌며 항일 운동에 뛰어들었으며 3.1운동이 일어난 후 상해에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그는 의정원 충청도 의원으로 활동하였다. 이 무렵 김갑수는 김인전 선생의 여동생 김정신과 결혼하였다. 1921년 27세 때 선생은 상해임시정부에서 파송하는 유학생 16명을 인솔하여 독일 유학길에 올라 베를린의 뷔이그즈대학에서 4년간 수학하며 물리학을 전공하였다.


귀국 후에는 북간도 용정으로 건너가 동흥중학교에서 교사로서 민족 교육에 힘쓰기도 하였으며 전북 완주에서 설립된 산업조합의 이사로서 민족자본의 육성과 임시정부 자금 마련에 진력하다 1938년 45세의 아까운 나이에 타계하였다.
그의 묘소는 한산면 종지리 광산김씨 선산에 있다. 3·1절을 맞아 김갑수 선생의 묘소를 참배하고 손자 김석중(75)씨를 만나 살아온 이야기를 들었다.
그의 증조부는 한산에서 재산이 꽤 넉넉한 집안이었다 한다. 월남 선생이 종지리 교회를 세울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증조부 김영성이 자금을 대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독립운동가 후손들이 그러했듯 김석중씨 아버지(김용탄) 대에서는 살림이 넉넉지 못하였다. 이 때 그의 어머니(김정자)의 삯바느질에 힘입어 그의 숙부는 일본 상지대에 유학까지 하였다 한다. 전북 진안의 천석군 집안 딸인 어머니는 어려운 집안 살림을 맡아 한복 만들기로 한평생을 보냈다. 이러한 어머니 덕분에 그는 군산중, 군산고를 나와 서울 중앙대학교를 졸업하였다.


국내외에서 조국의 독립을 위해 열성을 다 바친 김갑수 선생의 행적은 뒤늦게야 인정을 받아 1993년 광복절에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옥고를 치른 바가 없어 건국훈장보다 한 등급 낮은 건국포장으로 결정됐다는 것이다. 나라를 되찾겠다는 일념으로 간난신고를 다 겪은 그에게 옥고를 치르고 안치르고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해방을 맞아 나라를 다시 세울 때 큰 일을 맡아 하셨을 분인데 일찍 타계하신 것이 몹시 안타깝다는 말을 전했다.
그에게는 아픈 상처가 또 하나 있다. 공군 대위로 복무하던 동생이 1968년 김신조 사건이 발생하여 제대가 몇 개월 늦추어졌다. 이 기간 동안에 동생이 의문의 교통사고를 당해 사망한 것이다.


김석중씨는 슬하에 1남1녀를 두었는데 모두 미국에서 살고 있다. 부인에 이어 수 년 전 어머님마저 세상을 뜨자 그는 서울 살림을 정리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조상들의 묘를 지키며 혼자 살고 있다. 3·1절을 맞아 대전에서 열린 기념행사에 다녀오는 길이라 했다.


구제역 여파로 마산3·1운동 기념행사도 조촐하게 치러졌다. 그의 증조부가 지었다는 토담집이 월남 선생 생가 뒤편에 아직도 남아 있어 그들의 숨결을 아직 느낄 수 있건만 3·1절을 맞은 종지리는 조용하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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