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가운 음성
반가운 음성
  • 한기수 컬럼위원
  • 승인 2011.07.19 10:07
  • 호수 57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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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기수 컬럼위원
6월 중순부터 시작된 장맛비는 7월 들어서는 거의 매일 비가 내리며 많은 강수량을 기록하고 있다. 또한, 올해 장마는 국지성 집중호우로 말미암아 인명 피해가 속출했고, 가옥과 농작물이 침수되고, 산사태로 도로가 유실되는 등, 여느 해보다 큰 피해가 발생하는 것 같다.


또한, 거의 매일 내리는 장맛비로 인해 높은 습도와 불쾌지수까지 겹쳐 여러 사람을 만나는 직업을 가진 필자로서는 곤혹스러운 나날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장맛비는 나의 바람과는 달리 오후가 되어도 그치기는커녕 더욱 세찬 바람과 함께 내리고 있었다. 그렇게 쉼 없이 내리는 장맛비를 탓하며 창밖을 바라보고 있는데 모르는 국제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나는 보이스피싱(voice phishing)인가 싶어 잠시 망설이다가 전화를 받았다.


아! 그런데 어디선가 들어본 낯익은 목소리였다. 발신인은 필자와 한때 같은 사업에도 투자했고 아주 절친한 사이였던 선배였다. 하지만 9년 만에 들어보는 음성이었다.
선배는 그 당시 꽤 규모가 큰 사업체를 운영했고, 전망도 밝아 보였으며 사업도 나날이 번창했다. 그러던 중 예상치 못한 회사 내의 잇따른 사고와 납품업체의 부도로 인해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그리고 결국 1년 후 부도가 났다.


그로 인해 선배와는 연락이 끊겼고, 주위의 많은 사람이 선배 때문에 부동산 압류까지 당하는 등 많은 피해를 보았다.
그러자 그간 친형제처럼 가깝게 지냈던 지인들조차 모든 할 수 있는 법적 절차를 밟았다. 하지만 난 그들과 함께 할 수 없었다.
그들은 내가 여유가 있어 그렇다는 등, 미리 알고 있었다는 등. 여러 이야기를 했지만, 난 그런 이야기에 개의치 않았고, 그들에게 내 내면의 마음을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


내가 그들과 함께 법적 절차를 밟지 않았던 것은 그간 겪어온 선배의 성품과 정직과 성실하게 회사를 운영해온 선배의 진실을 잘 알기에 그럴 수 없었다. 또한 그들과 법적절차를 함께 밟는다 하여 선배 때문에 피해를 본 어떠한 보상도 당시로서는 받기 힘든 상태였고, 서로에 대한 믿음과 신의만 깨지며 서로에게 마음의 상처만 줄 것 같아 그러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일이 있은 후, 나 역시 선배와는 그 어디에서도, 만남도, 전화 한통도 연결이 안 됐다.
그리고 9년이란 시간이 흘렀고, 내 기억에서조차 서서히 잊혀질 무렵 연락이 온 것이다. 생각지 않은 연락에 난 너무 반가웠고, 그간 선배의 안부가 무척 궁금했다.


그 일이 있은 후 선배는 모든 걸 한 순간에 잃었다고 했다. 아니 제일 소중했던 가족과 형제간의 우애까지도 풍비박산이 났고 그간의 시간은 고통과 괴로움의 연속이었다고 했다. 하지만 모든 일에는 끝은 있는 법. 1년 전 해외에서 다시 시작한 사업이 조금씩 자리를 잡아가면서 자신 때문에 고통 받은 많은 사람들에게 조금이나마 빚 갚을 날을 손꼽아 기다린다고 했다. 그리고 제일 먼저 나에게 전화를 했다고 했다.


그러나 난 오히려 선배에게 미안함과 고마움이 교차했다. 선배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편안하게 해주려고 선배의 안부를 찾지 않았지만 그간 혼자 힘들어 했을 선배를 생각하니 마음이 무척 아려왔다.
우리는 어떠한 어려움이 닥치면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좋지 않은 시련이 연속 찾아온다. 그러다보면 마음에 여유가 없다보니 잃은 것만 생각하며 분노하고, 미워하고, 괴로워하며 시간을 낭비한다. 그러나 주위를 조금만 둘러보면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것이 많이 있다. 단지 찾지 않으니 보이지 않을 뿐이다.


9년 만에 반가운 선배의 음성을 들은 후 줄기차게 내리는 창밖의 빗줄기를 바라보며······ 나는 과연 오십 여 년을 살아오면서 막역지우(莫逆之友) 같은 친구가 몇 명이 있을까? 라고 생각해 보았다.
쉼 없이 내리는 장맛비, 세찬 빗줄기도, 얼마 후면······ 맑은 하늘을 수줍게 보이며 7월의 햇살이 눈부시게 우리의 마음을 비출 것이다. 어둡고 캄캄한 긴 터널을 지나면 밝은 태양이 기다리듯.


유난히 많이 내리는 올 장맛비가 그치면, 그간 잠시 잊고 지낸 소중한 얼굴들과 한여름의 태양 아래 내일의 파이팅을 위한 건배를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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