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이 살아나는 사회를 위하여
철학이 살아나는 사회를 위하여
  • 권 기 복 칼럼위원
  • 승인 2013.01.14 11:36
  • 호수 64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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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사년 새해, 해맞이를 하기 위해 동해에서, 전국 곳곳의 산정에서, 마량리 포구에서 꽁꽁 언 손발을 동동거리며 수많은 사람들이 환호성을 터뜨린 지 열흘이 지나고 있다. 사람들은 저마다 남다른 각오와 기원을 하며 새해, 새날을 맞이한 것이다.
게다가 전국적으로 흰 눈이 가득 내려 상서로운 기운이 방방곡곡에 가득하니, 그 의미가 배가되었을 것이다.


이를 대자연의 섭리로 생각해보면 어떨까? 해맞이는 지구의 자전으로 일어나는 자연법칙일 뿐이다.
그 자연법칙은 새해도 새날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지구가 약 24시간 간격으로 회전할 뿐이다.
 서설(瑞雪)은 어떠한가? 우리는 북반구의 중위도에 위치해 있지만, 지구가 23.5도 기울어 공전하기 때문에 여름에는 적도에 버금가는 열대기후를 맛보게 되고, 겨울에는 북극지방에 버금가는 한대기후를 겪게 되는 것이요, 이에 따라 겨울철 어느 날이든지 눈은 내릴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새해, 새날이라고 의미를 부여하며, 이런 날에 내린 눈을 서설(瑞雪)이라 여긴다. 이쯤이면 정말 믿지 못할 미신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싶다.


이리 따지고 보면, 나이나 생일, 달력조차도 의미가 없어질 것이다. 다만, 대자연의 순리에 따른 변(變)함 만이 존재할 뿐이다. 봄이 가면 여름이 오고, 여름이 가면 가을, 겨울이 오는 것뿐이다.
그렇다면, 이 얼마나 무미건조한 삶인가! 내일에 대한 무슨 희망이 존재하겠는가!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는 자기 인생에 ‘지혜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일이다. 스스로 탐구된 의미 중에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가치(즉, 인생관)’가 되는 것이며, 그 가치를 자기 자신에게 ‘내재적 심화(좌표로 삼는 것)’시킨 것이 철학이 아닐까 한다.


이는 곧 한 사람의 일생에 가장 소중한 것, 가장 가치 있게 여기는 것이 될 것이다.
즉, 자기 인생에 저마다의 지혜로운 의미를 부여하고, 가장 가치가 있다고 여긴 것을 좌표로 하여 나아감(化-인간 의지에 의한 변화과정)을 추구하는 것이다.


오늘날 산업사회로의 급격한 전환은 물질만능주의를 낳았다. 이로 인해 물질문명의 지나친 발전을 정신문화가 뒷받침 하지 못하여 곳곳에서 사회적 병리현상이 발생하고 있다.
특히 인간 이성에 바탕을 둔 정신문화는 처음부터 이성을 거부하고 회피하는 물질문명에 그 자리를 물려주면서, 인간성의 부재현상과 기존의 도덕성 상실이라는 가치관의 혼란을 초래하게 된 것이다.
물론, 어느 시대나 경제적 가치는 가장 현실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요즘만큼 심각하지는 않았다.
경제 지상주의, 이는 현실에서 거식증에 걸린 괴물이 되고 있다.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경제 기둥에 매달린 애벌레가 되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경제에 대한 허황된 꿈에 빠져 더욱 경제동물이 되어가고 있는 실정이다.  경제 기둥에 매달리는 수가 많을수록 그 기둥이 쉽사리 무너질 수 있다는 생각을 전혀 못하고 있다. 우리 사회의 인간성과 도덕성은 경제 지상주의에 그대로 파묻혀 버리고 있다.
‘열 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말처럼 사람의 마음은 가지가지이다. 철학은 그 사람의 마음을 가지가지로 풀어주는 것이다.

제각각의 좌표를 향해 나아가게 하고, 저마다의 행복을 꿈꾸게 하는 것이다. 알렉산더 대왕의 세계 경영 유혹을 뿌리치고, 한줄기 햇볕 쐼을 가장 큰 행복으로 여겼던 디오게네스의 지혜를 본받을 수 없을까?
명품도 없고, 기름진 음식이 없어도, 절대 무시할 수 없는 품위가 깃든 사람들이 살아가는 사회를 기다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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