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이 서천사람인 것이 자랑스럽다
선생이 서천사람인 것이 자랑스럽다
  • 황미자 글
  • 승인 2013.08.26 11:07
  • 호수 67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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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남 이상재 선생의 생애 답사기)

일제 강점기에서 해방된 것을 기념하는  8월 15일 아침! 사회활동가, 종교인, 정치가, 교육가, 언론인 월남 이상재선생의 삶의 흔적을 알아보기 위해 서천문예의 전당에 모인 34인이 버스에 올랐다. 


월남 이상재 선생이 거주한 서울 종로의 집터와 종묘공원 월남 이상재 선생의 동상,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삼하리에 있는 묘소를 찾아 그분의 업적과 정신을 기리기 위해 답사에 나선 것이다.
영원한 청년 월남 이상재(1850-1927) 선생은 한산면 종지리에서 목은 이색의 16대 손으로 꺼져가는 국운을 되살리기 위해 평생을 바친 분이다.
월남 이상재선생 기념사업회(이사장: 장만용)는 청년들의 등불이고 민족의 횃불인 그의 정신을 통하여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게 삶의 지침을 배우게 하는 시간을 마련한 것이다


7시에 출발한 버스 안에서 월남 이상재 선생 제 85주기 추모기념 연극공연 실황을 담은 ‘조선청년의 횃불! 월남 이상재를 관람했다. 암울했던 시대에 꿈과 웃음, 상생과 평등, 민족애와 화합 등 선생의 삶의 일대기를 조명한 작품이었다. 개화기 지식인 월남 이상재 선생은 YMCA를 통해 서구 스포츠인 야구, 정구, 농구 등 보급에 앞장서기도 했다. YMCA 초대 총무 질레트는 “ 우리 회에서는 60세이지만 가장 젊은 일꾼, 최고의 농담꾼, 야구경기의 열광자” 라고 월남 이상재 선생에 대한 평가했다.


서울 종로에 10시 도착해 첫 번째 방문지로 월남 선생이 살던 집터를 방문했다. 헌법재판소 내의 은행나무 아래, 이곳이 셋방을 살던 집터자리라는 말이 분분하다. 선생이 활동한 곳이라는 사실에 선생의 체취가 느껴졌다. 그 옆 3분정도 걸어가니 가회동 주민자치센터 앞에 또렷하게 ‘월남이상재 집터’라 쓰인 표석이 나타났다. 너무 반가웠다.


생의 60여 년 동안 종로를 떠나지 않고 시대를 앞선 삶을 살아간 선생의 맘이 전해졌다.  가난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유혹에 흔들림이 없이 살아온 선생을 생각하니 고개가 숙어진다. 
안정심 해설사의 설명에 따르면 청년이 교육을 받지 않으면 모래위에 집 짖는 것과 같다며 선생은 셋방에 살면서 사유재산을 축적하지 않고 청년 교육에 학비를 나눠주었다고 한다. 든든한 버팀목이요 인자한 아버지 같은 큰마음을 가진 선생이었다.


선생의 동상이 서 있는 종묘로 향했다. 선생의 연설을 듣기 위해 운집한 인파가 머릿속에 그려졌다. 서천에서 태어난 것이 너무 자랑스럽게 느껴졌다. 월남 선생이 주도한 만민공동에서는 천민이든 양반이든 누구든지 나라를 위한 생각을 펼쳤다. 그 자리가 바로 이곳이어서 이 자리에 월남 이상재 선생의 동상을 세우게 되었다고 한다.


답사 34인은 선생의 동상 앞에 엄숙히 묵념을 하고 이관구의 월남추모시를 해설사 안정심이 낭송하며 월남 이상재 선생의 생애를 되새겼다.

 희터럭 푸른 마음
구원의 청년이여
앞 뒤 절벽 어둠 길에
횃불 밝힌 거인이여
한 팔로 기우는 국운을 떠바치며
또 한 팔로 희망찬 젊은 일꾼 이끌며
겨레 위에 싸워내신
위대한 그 모습을
이제 이 자리에 우러러 모신다
<성재 이관구의 시>

중에 종로에 있는 탑골공원을 들러 가자하여 그리로 향했다. 그곳 독립선언문을 낭독했던 장소에 손병희 선생의 동상이 서 있었다 
월남 이상재 선생은 손병희 선생을 대표로 추대하여 직·간접적으로 만세운동 개최을 위한 준비를 도와 투옥되기도 하였다.


월남 선생은 일본검찰관의 심문에 답하며 “3. 1운동은 천의이며 3. 1운동은 2천만 민심의 발로이며 독립운동은 그 독자의 뜻대로 각자의 양심에 따라 자의로 한 것 일뿐이다” 라고 하며 자주독립 의지를 나타냈다.
월남 이상재 선생과 함께 독립운동에 힘쓴 손병희 선생의 동상 앞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자주독립국임을 감사했다.


버스로 돌아가는 중에 ‘육의전터’ 의 표석에 ‘모시’ 라는 글이 있어 무척 반가웠다. 한산 어머니의 혼이 담겨 있는 모시가 이곳 육의전에서 크게 거래되고 있었음을 뜻하기 때문이다. 모시를 팔아 선생도 공부를 하였음을 생각하니 마음이 찡하게 다가온다. 서천 어머니들의 높은 자녀 교육열과 희생정신 속에서 선생도 성장했을 것이다.


서울을 뒤로 하고 1시간 정도 가니 선생의 묘소가 있는 경기도 양주군 장흥면 삼하리에 허름한 안내판이 보였다. 하지만 선생의 묘소 입구에는 안내판조차 없어 많이 불편했다.
선생의 묘소를 둘러보기 위해 아이들과 함께 걸으며 월남 이상재 선생의 유년시절을 보낸 한산면 종지리의 풍광을 그려보았다. 


1927년 3월 29일에 조선의 거목이며 민족의 횃불인 월남 이상재 선생은 78세로 서울 재동 셋집에서 별세하였다.  서거소식이 전해지자 윤치호 등 114명이 모여 사회장의위원회를 구성 4월 7일 우리나라 최초의 사회장으로 치러졌다.
월남 이상재 선생의 서거로 서울시 인구 3분의 2인 20만 명의 애도 물결을 뒤로 하고 고향인 충남 서천군 한산면 건지산 중턱 선영에 안치하였다.


1957년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은 그가 제일 존경하는 월남 이상재 선생의 한산 선영의 묘소를 경기도 양주군 장흥면 삼하리에 옮기기 위해 헬기를 타고 한산의 건지산에 내렸다 한다. 이승만 대통령은 월남선생의 묘지 이장 당시 친필로 비문을 쓰고 묘비 제막식에 참석하여 거행하기도 했다.   
묘소 앞에서 다시 한번 월남 선생의 업적과 영원한 만년 청년이인 월남 선생의 정신세계에 대하여 깊은 생각을 갖게 되었다.   


오후 4시쯤 월남 이상재 선생의 생애 답사를 마치고 서천으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 각자의 느낌과 생각을 발표 하는 시간을 갖게 되었다. 특히 월남 선생의 청년교육의 중요성이 미래의 꿈나무인 서천 어린이들의 생각을 들을 수 있었다.  월남 선생의 답사가 재미있었고 학교에 가서 다른 친구들에게 가르쳐 주기도 하겠다는 말을 하고 있었다. 어린이들의 생각을 들으며 월남 선생의 정신이 젖어 들고 있음을 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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