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안숙선의 판소리
특별기고- 안숙선의 판소리
  • 최현옥
  • 승인 2003.04.04 00:00
  • 호수 16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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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의 현대화란 있을 수 없는 말이고 선대의 원형(原型)을 가능한 한 그대로 보존하는 것일 뿐이다. 선대의 더늠을 다쳐서는 안되고 그에 후대의 독창(獨創)이 있어야 할 것은 당연한 일이다. 창자(唱者)가 현대인이면 그것이 현대화다.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 되는 것과도 같다.
안숙선의 판소리는 이미 세계적인 것이다. 그런데 엊그제 아침(아마 3월26일의 아침일 것이다) KBS1 TV에 방영된 관현악단과 협연한 안숙선의 심청가는 아주 망한 소리가 되고 있었다.
창자(唱者)인 안숙선 뿐만이 아니라 그 프로의 기획자, 연출자 그 밖의 관계자 그리고 그런 프로에 출연하는 국악인 모두에게 해당되는 말이다.
판소리는 그런 시끄러운 악기들속에서 연주되는 음악이 아니다. 일창자(一唱者) 일고수(一鼓手) 뿐인 것이 판소리 마당이다. 창자·고수가 모두 1인 백 역을 한다. 추임새가 있고 너름새가 있다.
창자가 냅다 내지르는 상성(上聲)은 참으로 가는 세성(細聲)이 되어 들릴 듯 말 듯 한데까지 한없이 올라가고 아래로 뚝 떨어지는 하성은 바늘 놓치는 소리도 들려야 한다. 시끄러운 악단 속에서 가능한 것이 아니다.
판소리는 관중도 같이 하는 마당놀이다. 소리꾼의 소리를 들으며 고수가 하는대로 이쪽은 무릎장단을 치고 추임새도 같이 한다. 판소리가 마당놀이가 되는 소이(所以)다.
판소리에는 박자 장단 외에 음율반주는 없다. 고수와 창자 자신의 추임새가 높고 낮은 그 음율장단의 역할이 될 뿐이다. 당연히 콘닥터의 지휘자 같은 건 없다. 판소리의 지휘자는 고수다. 판소리 마당에 엊그제 아침의 그 오케스트라와 같은 시끄러워야할 것들은 아무 것도 없다. 넓은 마당(무대)에 거의 동작이 없는 창자와 고수와 둘 뿐이고 나머지 공간은 동양화의 여백 같은 것이다.
판소리는 작곡자의 악보에 의해서 연주되는 음악이 아니다. 소리꾼 스스로의 자작곡으로 연주되는 것이고 선대의 더늠이 있을 뿐이다.
더늠이란 오랫동안 구전심수(口傳心授)로 전수되어온 창법이다. 그에는 선대 선생 마다의 특징(特徵)이 붙어있고 그에 다시 각기 소리꾼의 독창(獨創)이 붙어서 되는 소리가 판소리다. 그 독창은 우리 전래 시가의 가능한 율격(律格)을 모두 아우른 것이라야 한다. 인간의 창조란 고도의 모방(模倣)을 말한다. 절대자 외에 참 창조는 없다. 더늠 곧 창조고 모방이다. 판소리 창자는 타고난 창의력이 풍부한 작곡가이다. 악보가 없는 만큼으로 채보(採譜)도 불가능한 것이 판소리다.
음악에 작곡과 판소리만이 창작문학과 창작미술과 함께 예술이고 기타의 모든 음악은 예능이다. 판소리는 오케스트라와 협연이 되는 음악이 아니다. 오케스트라와는 그만두고 같은 류의 합창도 되지 않는 음악이다. 가야금 병창이 있지만 대중화를 위한 타령조로 편곡하여 보이기 위해서 하는 것일 뿐이다. 거듭 판소리의 현대화란 있을 수 없고 보다 원형을 보존하는 것일 뿐이다. 이미 세계적인 판소리가 되어 있는 안숙선의 창은 더구나 그렇다. 볼거리를 위한 그 어떤 유혹에도 빠져서는 안될 것이다.
<박경수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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