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모시장터- 무꽃
■ 모시장터- 무꽃
  • 칼럼위원 신웅순
  • 승인 2019.05.23 10:40
  • 호수 95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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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집에서 작은 동산을 넘으면 밭 하나가 있다. 우리는 그 밭을 뒷뜰밭이라고 불렀다. 밭 옆에는 우물이 있고 미니리깡이 있다. 어머니는 언제나 그 우물에서 빨래를 했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집은 언제나 절간이었다. 아버지는 일터로 어머니는 빨래를 하러 갔다. 배가 고팠다. 나는 동산에 올라 엄마 배고파하고 부르면 어머니는 아들하면서 대답했다. 빨래를 하다말고 집으로 돌아와 순식간에 밥을 차려주었다.

심심하면 나는 뒷뜰밭을 찾았다. 두 번씩이나 찾는 일도 있었다. 뒷뜰밭엔 주전부리할 게 많았다. 시디신 탱자도 있었고 다디단 단수수도 있었고 달콤한 딸기도 있었다. 미적지근 물외도 있었고 떫은 가지도 있었고 지린 무도 있었다.

여름이면 매일 풀을 맸다. 뙤약볕이라 산그림자가 져야 풀을 맬 수 있었다.

니 아버지 기다렸다간 세월 다 가겠다.”

어머니는 그렇게 말씀 하시며 늘 나와 어린 동생을 데리고 풀을 맸다. 아버지는 한량가였다. 며칠만 매지 않으면 풀은 어린 내 키만큼 자랐다. 어렸을 때 땀방울을 많이도 흘렸고 가뭄에 잘도 견뎌주었던 땅이었다. 생강도, 감자도, 마늘도 이것 저것 심어 먹거리를 제공해주었던 고마운 땅이었다.

60여년이 흘렀다. 뒷뜰밭은 내 시의 원천이었다. 저녁 때면 어머니는 내게 심부름을 시켰다.

가지 따와라, 물외 따와라.”

어머니는 그것으로 저녁을 했다. 그렇게 뒷뜰밭은 우리 가족의 건강을 지켜주었던 먹거리였다.

그 땅이 팔렸다는 것이다.

뒷뜰밭은 그 자리 그대로인데 그런데 내 마음의 뒷뜰밭은 어디로 갔을까. 그 곳은 아버지 어머니의 땅이었다. 한 세대가 지나면서 뒷뜰밭은 향수의 땅이 아닌 재산의 땅으로 바뀌고 말았다. 가족의 먹거리를 제공해주었던, 가족의 건강을 지켜주었던, 가족이 공유했던 추억어린 땅이었다. 그것이 팔렸다. 뒷뜰밭은 결국 우리 가족을 배반했다.

 

시냇물 소리를 들으며 피었던

솔바람 소리 흔들리며 피었던

언덕 아래 그 꽃

 

먹구름 보내고 봄비 혼자 울기도 했던

언덕 아래 그 꽃

- 무꽃전문

 

풀을 매면 그렇게도 허리가 아팠다. 앞에는 진달래가 피고 산딸기 여무는 바위고개가 있었다. 그 앞산에서 불어오는 솔바람으로 땀방울을 씻곤 했다. 옆에는 작은 개천이 흐르고 있었다. 물소리를 들으며 풀을 맸다. 솔바람 소리와 물소리가 만나는 곳이 바로 뒷뜰밭이었다. 해마다 봄비가 왔다가면 청량한 습자지 같은 무꽃이 피었다.

먹구름 보내고 봄비 혼자 울었던 뒤뜰밭. 이제는 나 혼자 돌아서야하는 땅이 되었다. 세월은 무정해서 그 어떤 사람도 그 어떤 물건도 강제로 이별하게 만든다.

시냇물 소리를 들으며 솔바람 소리에 흔들리며 피었던 무꽃. 수원수구하겠는가. 뒷뜰밭 한번 가보지도 않고 뒷뜰밭에 땀방울을 한 번도 흘려보지 않은 그 사람은 땅을 팔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아니다. 궁금해야 할 필요도 없겠다. 인연 따라 가는 것이 우리들의 삶이 아니던가. 가족의 설움과 그리움이 묻어있던 그 땅이 좋은 일에 쓰였으면 좋겠다.

놀래지 말어.”

그러면서 소식 전해주던 누님의 낮은 폰 목소리가 지금도 귓전을 울린다. 이별이 다녀가고 인생도 다녀가야 할 곳이 어디 이뿐만이겠는가.

나의 어머니시 한 수 읊어본다.

 

적막

어디쯤서

소나기가

지나가고

 

외로움

어디쯤선

눈발이

스쳐가고

 

이별이

다녀간 그 곳

인생도

다녀간 그 곳

- 어머니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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