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모시장터 / 김장하는 날
■ 모시장터 / 김장하는 날
  • 권기복 칼럼위원
  • 승인 2019.11.29 13:5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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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추 좀 더 가져다가 줘요.”

! 여기 있어요.”

속도 더 퍼 주세요.”

! 알았어요.”

그렇게 퍼 넣다가는 김치 다 못 담으니까 적당히 속 넣어라.”

언니가 속 많이 들어가야 김치 맛이 더 좋다면서 막 넣어요.”

 

앞마당이 시끌벅적하다. 아내와 누이들은 물론 딸과 여자 조카들까지 커다란 함지박에 빙 둘러 앉아서 배춧잎 새새에 속을 비벼 넣기에 여념이 없었다. 남자들은 간 절인 배추를 날라다 주거나 속을 퍼주고, 꽉 채운 김치 통을 정리하여 차곡차곡 쌓아놓았다. 이러저러한 이야기들을 조미료 삼아 양념하면서 허리가 뻐근해지고, 오금다리가 저리는 것조차 잊고 있었다.

 

, 모두 쉬었다가 합시다.”

 

주인댁인 셋째 누이가 쟁반에 김이 무럭무럭 나는 돼지고기 수육을 가득 내왔다. 서울에서 내려 온 조카는 양 손에 막걸리와 잔을 들고 뒤를 따랐다. 넓은 접시에 금방 버무린 김장 배추를 꼭지만 잘라낸 채 가득 담아서 내놨다. 저마다 자리에서 일어서면서, “아고고, 다리야!” 하면서 기우뚱기우뚱 일어서거나 난 허리가 안 펴져.” 라고 한 마디씩 하였다. 그렇지만 유난히 따사로운 늦가을 햇살보다 더 싱그러운 미소가 얼굴마다 가득했다.

 

어이, 00! 그동안 잘 지냈어? 아이구, 식구들이 잔뜩 모여서 떠들썩하구먼.”

“00이 형! 언제 내려 왔대유? 이리 와서 막걸리 한 잔 하셔유.”

저녁 때 서울 올라가야 하니까 한 잔만 받을게.”

 

셋째 누이네 옆집에서 아저씨가 매제를 찾아와서 인사를 했다. 마침 막걸리 잔을 기울이던 매제가 반갑게 맞이했다. 매제는 댓바람에 막걸리 한 잔을 따라 권했다. 막걸리 한 모금에 굵직굵직하게 썰어 내온 돼지고기를 김치로 둘둘 말아서 입 안 가득 밀어 넣었다. 마치 가을 전체가 제각각 입속에 가득가득 들어찬 듯이 풍성해졌다. 네댓 시간 뒤에는 먼 길을 떠나야만 하기 때문에 운전할 사람은 막걸리 대신 아침햇살로 아쉬움을 달랬다.

11월 말의 늦가을 햇살인데도 반바지에 반티 차림조차 이마에 땀이 몽글몽글 맺혔다. 슬리퍼만 신은 맨발인 채 찬물로 씻고 닦는데 손발이 시원하기만 하였다. 주로 김장 일은 여자들이 중심이 되었다. 남자들은 보조 역할을 하면서 뒷바라지를 했다. 그렇다고 하여 짜증을 내거나 꽁무니를 빼는 이 없으니, 이 얼마나 자연스러운 분업 체제인가!

옆집과 앞집들도 시끌벅적하였다. 오랜만에 시골길에서 뛰어노는 아이들을 보는 것이 여간 정겨운 풍경이 아닐 수 없었다. 오히려 추석이나 설날 같은 명절에도 쉽사리 볼 수 없는 풍경이었다. 명절이래야 잠시 차례지내고, 성묘를 마치면 후다닥 돌아가 버리기 때문에 뉘 집에 누가 오간지를 알 수 없는 일이 태반이 된 지 오래다. 감나무 꼭대기에 까치밥으로 남겨둔 빨간 감을 콕콕 찍어가면서 입맛을 다시는 까치들도 덩달아 신이 나서 이리저리 날아다녔다.

밭에서 무와 배추, 파를 뽑아다가 다듬고 정리하는 일부터 소금 간을 하여 절이는 일로 하루를 보냈다. 다음날은 새벽부터 일어나서 절인 배추는 난간 위에 널어서 물기를 빼내고, 무는 소쿠리에 건져내는 일부터 시작하여 양념 속을 만들고 버무려서 김치 통에 담는 일까지 또한 하루거리였다. 제각각 차에 김치 통을 싣고 아쉬운 작별의 인사를 나누고자 할 때에는 하루해가 서산에 걸쳐있었다. 12일의 허리 아픈 공동 작업은 겨우내 먹거리에 대한 든든한 마음속에 녹아들어 서로 어깨와 등을 다독여 주면서 발걸음을 돌렸다.

가장 신바람이 나서 김장 일을 거드는 열 살 터울의 사촌 형, 누나들 곁을 비비적거리며 재재거리던 조카의 얼굴이 울상이 되었다. 또 다시 텅 빈 마을에 저 홀로 남아야 하는 어린 조카의 마음을 헤아리는지 이틀 동안 내내 온화하던 날씨가 돌변하였다. 조카 녀석은 종종 배추 밑동이 잘리고, 무와 파가 뽑힌 텃밭을 바라보며 김장하던 날의 추억을 겨우내 그림 그릴지 모르겠다. 내 고향, 서천에서 돌아오는 길 내내 비바람이 사납게 휘몰아치기만 했다.

<권기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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