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송우영의 고전산책 / 성탁천각聲啄穿刻
■ 송우영의 고전산책 / 성탁천각聲啄穿刻
  • 송우영
  • 승인 2020.05.28 14:52
  • 호수 100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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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큰소리로 글을 읽으니 아들은 아버지의 글 읽는 소리를 듣고 그 글이 저절로 머릿속에 박힌다)

다행히 내가 두 눈알을 지녀<행여유쌍안幸余有雙眼> 자못 글자를 알므로<공파식자孔頗識字> 손에 한 권의 책을 들고 마음을 위로삼아 보노라면<수일편위심간手一編慰心看> 잠시 뒤엔<소언少焉> 좌절되던 마음이 조금 안정된다<흉중지최함자사저정胸中之摧陷者乍底定> 만일 내가 눈이 비록 오색<····>을 볼 수 있지만<약여목수능시오색若余目雖能視五色> 서책에 당해선 깜깜한 밤 같았다면<이당서여흑야而當書如黑夜> 장차 어떻게 마음을 쓰겠는가<장하이용심호將何以用心乎>” - 이덕무 청장관전서 이목구심서2

이 글의 원전이 백강의 계자서인데 백강의 큰아들 이민장은 어린 시절에 공부에 크게 관심이 없었던 듯했다. 기다리다 못한 아버지가 아들에게 계자서를 써주면서까지 책을 한 것을 보면 예나 지금이나 자녀가 공부를 잘해주기를 바라는 부모의 마음은 다 똑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경여가 큰아들 이민장에게 계자서의 책을 써준 때가 대략 17세 되던 해 벼 심을 시기라 했으니 아마도 5월이나 6월 어느날 쯤 되리라 본다. 하루는 아버지가 큰아들을 불러놓고 말한다.

네 나이 16세가 지났음에도 학문을 이루지 못했다 하니 이는 아버지의 가르침이 부족한 탓이기도 하지만 너 또한 후회하고 부끄러워해야 한다. 지난 일을 말할 필요는 없지만 지금부터라도 열심히 공부하면 충분히 따라잡을 수 있다. 마음을 새롭게 하고 아침 일찍 일어나고 밤늦게 자는 한이 있어도 공부하도록 하거라. 다행히도 두 눈이 창청하거늘<행여유쌍안창청幸余有雙眼蒼淸> 너는 왜 공부하지 않느냐<하여불서何汝不書> 경전의 글에 대해 깜깜하다면<이경서묵而經書黑> 장차 어디에 쓰겠는가<장하이용將何以用>”

이경여는 공부에 관한 한 자녀교육에 성공한 발군의 인물이다. 이경여는 자녀교육을 대제학이라는 대학자에 기준을 두고 어려서부터 절차탁마를 시켰던 것이다. 그럼에도 더 중요한 것은 그런 힘든 과정의 공부를 어린 자녀들이 불평없이 잘 따라 주었다는 점이다. 아버지가 공부하란다고 해서 그걸 또 미련스럽게 공부하는 자녀는 뭔가. 그야말로 효자란 이런 자녀를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아버지가 공부하라니까 하루 종일 공부하는 그런 자녀를 둔 아버지는 정말 행복한 아버지가 분명하다. 이 말은 훗날 우암 송시열이 이경여의 셋째 아들 이민서를 가르치면서 이민서가 어린 나이임에도 글자를 꽤 알자 우암이 물었다. “어떻게 이리도 어려운 글자도 아는가?” 이에 이민서가 답한다. “제가 5세 때 가친께서 워낙 머리에 쪼아넣으셔서<성탁聲啄> 제 머리에 글자가 박혔습니다<천각穿刻>” 라고 했다. 여기서 나온 고사가 성탁천각聲啄穿刻이다. 아버지가 큰소리로 글을 읽으니 아들은 공부를 하지 않아도 저절로 아버지의 글 읽는 소리를 듣고 그 글이 머릿속에 박힌다는 말이다.

공부를 해본 사람은 안다 이런 식의 공부가 얼마나 뼈를 깎고 살을 에는 아픔인지를. 그런데 이런 과정을 아버지와 아들들이 해냈다 하니 후학으로서는 절로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다. 이런 공부는 쉴 틈은 고사하고 한눈 팔 틈도 없다. 이들의 공부법을 훗날 김좌근의 양자 김병기는 삼즉학三則學이라 불렀다. 눈뜨면 공부하고<啓則學> 틈나면 또 공부하고<闖則學 어떤 이본에는 틈을 간이라고도 씀> 쉬다 말고 느닷없이 공부하는<休則學> 것이다.

흥선대원군이 일생에 가장 부러워한 인물이 한 명 있는데 바로 그가 김병기라 했다. 흥선군 왈, “아들을 낳으려면 김병기 같은 아들을 낳아야 해

그렇게 공부한 결과 아들 이민서李敏敍는 대제학大提學으로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올랐고 손자 이관명李觀命은 대제학大提學으로 좌의정左議政에 올랐으며 증손 이휘지李徽之는 대제학大提學으로 우의정右議政의 지위까지 올랐다. 조선시대에는 3대를 내리 대제학 배출 가문이 넷 있는데 광산김씨 사계 김장생 가문. 연안이씨 월사 이정귀 가문. 대구 서씨 약봉 서성 가문. 그리고 전주후인 백강 이경여 가문이다. 한 세상 누군가의 자식으로 태어나서 공부로 청금록에 빛을 낸 사람들. 이런 인생은 하늘을 본들, 땅을 본들, 뭐가 두렵고 뭐가 부끄러우랴. 훌륭할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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