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송우영의 고전산책 / 비록 가난하더라도 그 가난을 걱정하지 말거라
■ 송우영의 고전산책 / 비록 가난하더라도 그 가난을 걱정하지 말거라
  • 송우영
  • 승인 2020.08.14 10:08
  • 호수 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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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심보감明心寶鑑 43문장 존심편存心篇에 이르기를, “군자는 가난을 걱정하여 부귀를 추구하기 보다는 도리를 깨닫지 못함을 걱정해야 하며<군자우도불우빈君子憂道不憂貧> 군자는 끼니를 걱정하여 생계유지할 방도를 강구하기 보다는 공부에 힘써야 한다<군자모도불모식君子謀道不謀食>”

이는 공자의 말로 논어가 그 원전인데 공자께서

군자는 도를 생각하되 먹을 것은 생각하지 않으니, 밭 갊에 굶주림은 그 가운데 있고, 공부하면 재물(녹봉)이 그 가운데 있다. 그러니 군자는 도를 근심해야지 가난함을 근심하지 않는다<자왈子曰 군자모도불모식君子謀道不謀食 경야耕也 뇌재기중의餒在其中矣 학야學也 녹재기중의祿在其中矣 군자우도불우빈君子憂道不憂貧> (논어위령공편 31문장)

여기서 방점은 밭 갊에 굶주림이 그 가운데 있다<君子謀道不謀食>는 말이다. 일을 하는데도 여전히 가난해진다는 말로 여기에서 일만하는 사람을 돈 벌 틈이 없다는 말이 생겨난 유래다. 암튼 이 문장은 이천년이 지난 지금도 논란의 중심에 선 문장 중에 하나이다.

현실주의자요 철저한 실용주의자라는 다산 정약용도 그의 제자 윤종심尹鍾心에게 준 글에서 너는 비록 가난하지만 그런 걸 걱정하지는 말라<汝雖貧其勿憂>”라고 편지까지 써서 독려를 했다고 한다.
하루는 사마우司馬牛가 공자에게 인이 뭡니까 하고 물으니 공자가 답한다. 은 말을 참는 것이다<인자기언야인仁者其言也認>라고 하였다. 논어에는 인에 대한 공자의 다양한 답변이 나오는데 그중 가장 명쾌한 답변이 사마우에게 해준 답변이다.

북송의 학자 여조겸은 제자에게 글을 가르치면서 인자기언야인仁者其言也認이라는 말에서 인을 따로 떼어서 해석하기를 치레致禮, 곧 남에게 예를 보낸다는 말로 체면을 차린다는 뜻이다. 곧 사람에게는 누구나 남에게 함부로 말하지 못하고 드러내지도 못하는 속마음이라는게 있는데 재색명리財色名利라 했다. 즉 욕망의 근간이 되는 재물과 색과 명예와 이득이다. 제자가 재색명리財色名利를 이길 수 있는 방법이 뭡니까 하니 여조겸 왈. ‘호학지사이好學之士耳로 살아가기라고 답했다. 공부하기를 좋아하는 선비로 살아가는 길 뿐이라는 말이다.

휴학지죄무범야休學之罪毋犯也라는 말이 있다. 공부하기 쉬는 죄를 범치 말라는 말이다. 어린 시절과 청년시절을 이렇게 공부한 이가 있었으니 조선예학의 종장 宗匠 사계광산후인 장생이 그다. 남모르게 천하를 뒤져서라도 스승을 찾아가 공부한 사람이다. 토정 이지함은 이런 사계의 열정을 높이 사서 공부 도둑이라는 농담을 하기도 했다.

사계의 14대 종손 김선원이 재실인 염수재 앞에서 한 말에 따르면 사계는 13세에 아버지 친구인 구봉<龜峯宋翼弼>으로부터 사서四書와 근사록 등을 배우고 20세에 율곡의 문하로 나아갔다고 했는데 사문에 전하는 바는 조금 다르다. 8세에 율곡에게 먼저갔다가 수신의 근본이 되는 몸 공부가 부족하여 9세에 금강산에 은거하는 구봉에게 가서 10년 몸 공부하고 20세에 이르러 해주 석담에 머물러 있는 율곡을 찾아가 공부를 한다. 물론 여기에는 어머니 평산 신씨平山申氏<우참찬 신영申瑛의 여식으로 신영의 손자가 상촌 신흠이며 그의 모친이 은진 송씨 좌참찬 송기수의 여식> 권유가 한 몫했는데 구봉이 어린 시절 노비생활? 할 때 신영申瑛 문하에서 글을 깨우친 인연 때문이다.<이 부분은 긴 설명이 필요하므로 후일 재론키로 함>

구봉과 율곡은 외가 및 아버지 김계휘의 학문적 도반이었던 관계다. 그리고 방외 스승으로 보령에 은거하는 토정 이지함을 찾아가 공부했고 경기도 파주 우계에 살고 있던 창녕사람 성수침成守琛의 아들 우계牛溪 성혼을 찾아가 공부를 하기도 했다. 우계와 율곡은 사계를 통해 막역지우가 된다. 10대 어린시절부터 청년기인 약관 전후에 이르기까지 구봉에게서 예학禮學을 율곡에게서 이학理學을 우계에게서 경세經世를 토정에게서 궁리窮理를 섭렵하게 된다.

그야말로 공부만이 전부였던 삶이다. 그렇다면 사계 김장생은 그 어린나이인데도 왜 이토록 공부했을까. 현재와 같은 정태적이고도 단면적 삶에 머물지 않기 위한 몸부림인 것이다. 하나의 단면을 보더라도 전체를 읽어내는 치국지안治國之眼을 위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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