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모시장터 / 연꽃 생일 / 신웅순
■ 모시장터 / 연꽃 생일 / 신웅순
  • 신웅순 칼럼위원
  • 승인 2020.08.28 10:59
  • 호수 102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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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의 반포유고습유서(伴圃遺稿拾遺敍)’라는 글을 쓰다 연꽃도 생일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관서에 이런 구절이 있다.

계묘년 연꽃 생일날 실사구시재가 쓰다.

신웅순 칼럼위원
신웅순 칼럼위원

연꽃 생일은 음력 624일이며 관련절이라고도 한다. 실사구시재는 추사의 당호이다. 이 때 연꽃에도 명절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꽃말은 있어도 꽃명절이 있다는 말은 여태껏 들어보지 못했다. 맞다. 나는 어리석게도 꽃을 좋아만 했지 꽃을 사랑하지는 못한 것 같다.

내가 좋아하는 꽃 3가지를 꼽는다면 주저하지 않고 매··연을 꼽겠다.

, 선비 노릇까지, 가지가지 다하네.”

사람들은 빈정댈지 모르겠다. 그래도 좋다. 나에겐 좋아하는 이유가 있다. 매화는 아무리 추워도 향기를 팔지 않아서 좋고, 대나무는 언제나 속을 텅 비우고 있어서 좋고, 연은 온갖 더러움에 물들지 않아서 좋다. 세상을 살면서 그리 산다면야 얼마나 좋겠냐만 나는 솔직히 그렇게 못 살았다. 그리 살려고 안쓰러우리만큼 노력해왔을 뿐이다. 살면서 왜 향기를 팔지 않았겠으며, 왜 마음을 비우지 못했겠으며, 왜 더러움에 물들지 않았었겠는가. 그래서 나는 이 꽃들을 더욱 좋아한다.

아내에게 말했다.

여보, 매화 좀 키울 수 없을까.”

그게 어디 쉬운 줄 알아요?”

다 내 몫이니 어불 성설, 아내는 말을 말라는 것이다. 나는 그동안 꽃에게 미안함을 넘어 많은 죄를 지었다. 물을 제 때 주지 못해 얼마나 많은 꽃들이 내게서 죽어나갔는가. 그것을 내 아내와 주위 사람들은 다 알고 있다. 꽃을 좋아하기는 하나 진실로 사랑하지 못한 까닭이다. 그리하고도 나는 사람을 사랑한다고 사랑의 시 수백편을 썼으니 참으로 뻔뻔하기 이를 데 없다.

요새 아내에게 말 한 번 잘 못 했다간 본전도 못 찾는다. 그렇게도 나는 철딱서니가 없다. 공부만 하지 아는 것도, 하는 것도 제대로 없다. 학자로서의 본분이야 지킬지 몰라도 생활은 영 딴판이다. 부닥쳐야만 살아갈 수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래서 아내가 나와 함께 살아 주는 것만도 감지덕지하다.

내 인생에 굽을 틀게 해준 사람이 있다. 그 때 그 분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나는 이 자리에 없을 것이다. 나를 늪에서 구해준 눈물겨운 은인이다.

선생님의 은혜는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합니다.”

그 말이 내 전부이다. 행하지 못하고 말만 하는 사람, , 참으로 부끄럽고 부끄럽다.

연꽃에 생일이 있듯 굽을 튼 인생의 인연에도 생일을 만들어야 할 것 같다. 그것은 인간의 최소한의 도리라는 생각이 든다. 그 분과의 만남을 추억한다는 것은 얼마나 뿌듯하고 행복한 일인가. 내가 연꽃에도 생일이 있다는 것을 알고는 뒤늦게 이런 생각이라도 했으니 아찔하지만 천만 다행이다.

내 중학교 선생 때의 제자이다. 얼마 전에 차를 부쳐왔다. 차맛이 좋아 선생님이 생각났다는 것이다. 어떤 대학교 제자는 때때로 전화로 안부를 묻는다. 이러면 45년 선생에 본전(?)은 건진 것이 아닌가. 선생으로서 잘 살아온 것은 아니어서 억지 위로를 내가 내게 해주는 것이다. 세상에는 배반 아닌 배반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 때문에 가슴 아파하는 사람들도 많이 보아왔다. 다 잘못 살아온 자기 탓이리라. 그도 다 인연이라면 인연이리라.

고희이다. 학문을 이제 모두 내려놓을 생각이다. 그동안 하고 싶었던, 기다리고 고대했던 나만의 예술에 제대로 된 발자국을 디뎌볼 생각이다.

 

참말로

서러운 사람은

파도가 없다

 

참말로

그리운 사람은

바람이 없다

 

그 많은

파도와 바람이

방파제에서

부서진 것이다.

- 내 사랑은 45

 

옛날에 쓴 것인데 지금의 나를 두고 쓴 것 같아 소름이 돋는다. 세월이 흘렀으니 이제와 제목을 내 사랑은대신 연꽃 생일로 바꾸어도 깊은 뜻이 있을 것 같다.

인생의 굽을 튼 사람을 다시 생각하게 해준 오늘 인연의 꽃, 연꽃 생일이다.

<석야 서재 매월헌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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