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가족 찾지 못한 서천의 독립유공자들
■ 유가족 찾지 못한 서천의 독립유공자들
  • 허정균 기자
  • 승인 2020.08.28 17:45
  • 호수 102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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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나라가 식민지에서 벗어나 독립을 이루면 독립을 위해 일한 사람들부터 기리는 것이 상식이다. 1948년 해방이 된지 3년 후 대한민국 정부가 들어섰지만 이승만 정부 내내 독립유공자에 대한 서훈이 없었다. 이승만 대통령 자신과 이시영 부통령의 단 2인 뿐이었다. 1962년 일부 서훈이 이루어졌고 1990년 이후에야 본격적인 서훈이 시작됐다. 그러나 유가족을 찾을 수 없는 독립유공자가 충남에 203인 서천군에 15인이나 된다. 보훈청 독립유공자 보훈록에 등재된 서천의 독립유공자 가운데 유가족을 찾지 못한 유공자 15인의 생몰연도와 공훈 내용을 싣는다. 직계 후손임이 밝혀지면 유가족의 명예회복은 물론 각종 예우 보상을 받을 수 있다. 보훈청에서는 유가족 찾기에 나서고 있지만 실적은 미미하다. 아래 독립유공자들의 유가족들에 대해 알고 있으면 뉴스서천에 제보해주시기 바란다.<편집자>

◆김삼석
- 생몰연도 : 1885~1909 이전
- 본적 : 충청남도 비인 동 판교

충남 비인(庇仁) 출신으로 1908년 4월부터 1909년 6월까지 이소선 의진(李素仙義陣)에 소속되어 충남 비인·남포(藍浦)·홍산(鴻山) 등지에서 의병 활동을 전개했다. 이소선은 충북 청주(淸州) 출신의 의병장으로 그 휘하에 약 40명의 의병을 거느리고 충남 남포·비인지방에서 의병 활동을 전개했다. 1908년 7월 4일 남포헌병대(藍浦憲兵隊)에 의해 남포군 습의면(習衣面) 간치시장(艮峙市場)에서 체포됐다. 김삼석은 1908년 4월경부터 이소선의 휘하에서 비인·남포·홍산 일원에서 의병 활동을 전개하다가 1908년 6월 28일 귀향했다. 이에 비인주재소(庇仁駐在所) 순사에 의해 체포됐다. 소위 내란방조죄(內亂幇助罪)로 기소되어 1908년 7월 19일 공주지방재판소에서 징역 1년을 받고, 이에 공소해 1909년 9월 1일 기각되어 형을 살던 중 옥중에서 순국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3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김정도
- 생몰연도 : 1879 ~ ?
- 본적 : 충남 서천 화양 장하

1908년 음력 3월경 충남 한산(韓山)ㆍ서천(舒川)ㆍ임천(林川) 등지에서 정찬경 의진(鄭贊敬義陣)에 참여해 활동하다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충남 한산 출신의 정찬경은 1907년 연산(連山)에서 김득수(金得洙)와 함께 창의해 한산ㆍ서천 일대에서 활동했다. 1909년 5월 50여 명의 의병을 이끌고 서천군 황동리(黃洞里) 일대에서 활동하던 중, 같은 해 7월 일본군 홍산수비대(鴻山守備隊)에 피살, 순국했다. 김정도는 1908년 음력 3월 중에 정찬경의진에 참여해 동료 13명과 함께 총기를 휴대하고, 한산ㆍ서천ㆍ임천 등지에서 한산순사주재소(韓山巡査駐在所)를 공격하는 등의 활동을 하다 체포됐다. 1908년 9월 21일 광주지방재판소에서 이른바 폭동죄로 징역 10년을 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1910년 대사령(大赦令)에 의해 출옥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4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김탁환
- 생물연도 : 1884 ~ ?
- 충남 서천 남양 군사, 주소 : 서울 누상 102

충청남도 서천(舒川) 사람이다. 1919년 10월 서울에서 일본 경찰로 가장해 독립운동자금을 모집하다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1919년 10월 2일 김강(金剛)ㆍ한호범(韓鎬範)ㆍ이경헌(李景憲) 등과 함께 서울 평동(平洞)에서 회합하여 독립운동자금을 모집하기로 협의했다. 한호범ㆍ이경헌은 서울 수창동(需昌洞) 홍종욱(洪鍾郁)에게 ‘조선총독부 경무국 사법계 형사 김영희’, ‘조선총독부 경무부 경부 김탁’이라고 새긴 명함을 제시하면서, “자신들은 형사ㆍ순사인데 김탁 경부의 명령이므로 동(同) 경부의 사택으로 동행하자”며 홍종욱을 김강의 집에 이르게 했다. 김탁환 등은 홍종욱에게 '경성부 애국금수합위원(愛國金收合委員)' 사령서(辭令書)를 보이며, 자신들이 조선독립의 운동비를 모집하는 사람임을 밝히고 독립운동자금을 요청했다. 이에 홍종욱이 한일은행 서대문출장소에 예입한 통장의 인장을 교부해 170원을 모집했다. 같은 해 10월 4일에는 서울 공평동(公平洞) 전동여관에 묵고 있던 이남종(李南鍾)에게도 2000원을 모집했다. 김탁환은 1919년 10월 22일 종로경찰서에 체포된 뒤 1920년 3월 13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保安法) 위반 및 강도죄, 가택 침입죄 등으로 징역 5년을 받았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4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문태근
- 생몰연도 : 1882 ~ ?
- 본적 : 충남 서천 화양 망월

충청남도 서천(舒川) 사람이다. 문태근은 충남 서천군(舒川郡)에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다 체포되어 태(笞) 90도(度)를 받았다. 서천에서 대대적인 만세운동은 1919년 3월 29일 마산면(馬山面) 신장리(新腸里) 장터에서였다. 장날을 이용해 3ㆍ1운동의 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한 기독교인 송기면(宋基勉)은 유성열, 이근호 등과 논의하고 29일 낮 1시경 장터에 모여드는 군중들에게 태극기를 나누어 주었다. 송기면이 단 위로 올라가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다음 독립만세를 부르자 군중들은 독립만세를 부르며 호응하여 시위에 들어갔다. 일경이 송기면 등 6명을 체포하자 격분한 군중 2000여명은 경찰주재소를 공격하고 6명을 구출한 다음 주재소를 부수기 시작하였다. 이때 경찰이 총을 쏘아 2명이 부상당했다. 군중들은 한산 쪽으로 시위를 계속하다가 결국 해산됐다. 신장리 독립만세사건에 이어 4월 30일에는 종천면(鍾川面) 화산리(花山里)에서 2000여명이 독립만세를 불렀다. 시위 후 체포된 문태근은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태 90도를 받았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3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했다.

◆박일복
- 생몰연도 : 1882~1809

- 본적 : 충청남도 남포군 원두리
충남 남포(藍浦) 사람이다.(현 서천군 서면 원두리) 1907년 9월 신도여(申道汝) 의진에 가담하여 동료 의병 280여 명과 함께 1908년 6월경까지 충남 보령(保寧)·남포·홍주(洪州)·청양(靑陽)·홍산(鴻山)·정산(定山)·부여군(扶餘郡)내의 각지에서 군자금 모집을 위해 활약하였고 1907년 11월경에는 홍산군(鴻山郡) 읍내에 거주하는 밀정 함성덕(咸聖德)을 오갑진(吳甲辰)과 같이 처단하는 등의 활동을 하기도 했다. 그 후 각지에서 군자금 모집 활동을 하다 체포되어 1909년 1월 29일 경성공소원에서 소위 폭동 및 고살(故殺)죄로 교수형을 언도받고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백치서
- 생몰연도 : 1868 ~ 1908
- 본적 : 충남 서천

충청남도 서천(舒川) 사람이다. 일제는 1905년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고 나아가 1907년 정미7조약으로 대한제국의 군대를 강제 해산했다. 이와 같이 국망(國亡)의 조짐이 심화되자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봉기해 국권회복을 위해 일제와 항쟁했다. 이와 같은 시기에 백치서는 일제를 이 땅에서 몰아내기 위해 분연히 일어나 김경명(金景明) 의진에 참여해 국권회복에 나섰다. 그리하여 1907년 11∼12월 충남 은진군(恩津郡)과 정산군(定山郡)을 공략했으며 십수 차례에 걸쳐 충남 각처에서 군자금을 수합하고 부일배를 처단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전개했다. 그러나 전투가 진행됨에 따라 탄환의 조달이 목전의 문제가 되었다. 그는 이를 위해 1908년 1월 서울에 잠입해 중국 상점에서 탄환을 구입했으나 귀대하던 중 일경에 체포되자 틈을 보아 탈출을 기도하다가 피살됐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6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서상복
- 생몰연도 : 1906 ~ ?
- 본적 : 충청남도 서천, 주소 : 미국 뉴욕 리버데일 네덜랜드 3000

1939년 5월 15일 북미대한인유학생총회 동부대회에서 준비위원으로 활동했고, 1941년 북미대한인유학생총회 위원장을 역임하였다. 1942년에는 세 차례에 걸쳐 독립운동 자금을 냈다.
1944년에는 북미유학생총회 동부지방회 위원장으로도 선임되었다. 11월 구미위원부 재조직을 위한 연합대표대회 석상에서 “우리 한국을 어떻게 하면 좀 더 낫게 할 수 있을 것인가 하고 늘 생각하고 있었다. 한국의 장래와 성공을 위하여 이 회가 원만히 잘 진행되기를 바란다. 우리는 다 일어나서 힘껏 돕자”라고 발언하기도 했다.
1945년 2월 미군에 입대하여 전략첩보국의 기초 훈련을 받았고, 독수리작전의 일원으로 참여하여 중국 시안에서 활동했다.
정부는 2017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유형식
- 생몰연도 : 1875 ~ ?
- 본적 : 충남 한산 북부 종

1909년 4월 충남 임천군(林川郡, 현 부여군)과 한산군(韓山郡, 현 서천군) 일원에서 이장준(李章俊) 등과 함께 군자금을 모집하고, 일본인 밀정을 처단하는 등의 활동을 했다. 이장준은 1908년 3월부터 1909년 3월까지 의병장 조농운(趙弄云)과 노백인(盧伯仁) 휘하에서 동료 의병 30~130여 명과 총기를 휴대하고 충남 임천ㆍ서천(舒川)ㆍ남포(藍浦)ㆍ비인(庇仁)ㆍ한산 등지에서 일본군과 교전하고 한산주재소에서 총기 등을 획득했으며, 재무주사 송규헌(宋珪憲)으로부터 군자금을 모집했다. 유형식은 1909년 4월 이장준 등 의병 6명과 함께 서천군 방죽동(方竹洞) 우 모로부터 8원 80전, 한산군 나교(羅橋) 박승유(朴承有)로부터 3원을 군자금으로 모집했다. 이어 4월 13일에는 한산군 하북면(下北面) 월명리(月明里) 부근에서 밀정 1명을 처단하는 등의 활동을 하다 체포됐다. 1909년 6월 21일 공주지방재판소에서 이른바 폭동죄 및 강도죄로 종신징역을 받고 공소했으나, 1909년 9월 22일 경성공소원에서 기각되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4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이영규
- 생몰연도 : 1889 ~ ?
- 본적 : 충남 한산 하북 마하산

1908년 음력 3월 충남 한산(韓山)ㆍ서천(舒川)ㆍ임천(林川) 일대에서 정찬경의진(鄭贊敬義陣)에 참여해 한산순사주재소(韓山巡査駐在所)를 공격하는 등의 활동을 하다 체포돼 옥고를 치렀다. 충남 한산 출신의 정찬경은 1907년 연산(連山)에서 김득수(金得洙)와 함께 창의(倡義)해 한산ㆍ서천 일대에서 의병투쟁을 전개했다. 1909년 5월 약 50여 명의 의병을 이끌고 서천군 황동리(黃洞里) 일대에서 활동하던 중, 같은 해 7월 일본군 홍산수비대(鴻山守備隊)에 의해 피살, 순국했다. 이영규는 김정도(金正道)와 함께 1908년 음력 3월 정찬경의진에 참여해 동료 의병 13명과 함께 총기를 휴대하고 한산ㆍ서천ㆍ임천 등지에서 한산순사주재소를 공격하는 등의 활동을 하다 1908년 8월 체포됐다. 1908년 9월 21일 공주지방재판소에서 이른바 폭동죄로 징역 10년을 받고 2년여의 옥고를 치른 뒤 1910년 대사령(大赦令)에 의해 출옥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4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이장준
- 생몰연도 : 1881~ ? 
- 본적 : 충청남도 기타 한산 하북 마지

이장준은 후기 의병기인 1908년부터 의병에 참여하여 충청남도 임천군(林川郡)·한산군(韓山郡) 각지의 순사주재소를 습격하고 군자금을 모금하는 등 대일항전을 전개하였다. 그는 1908년 초 조농운(趙弄云) 의병장의 휘하에 들어가 임천·한산·남포(藍浦)·비인(庇仁) 각지를 다니며 의병항쟁을 하였고, 동년 음력 2월 8일 130여 명의 의병과 서천군(舒川郡) 각 마을을 다니다가 우산리(牛山里)에서 일본군과 만나 교전하였다. 그리고 음력 4월 13일에는 한산순사주재소를 습격하기도 하였다.
그 후 음력 9월 노백인(盧伯仁) 의병장의 의병부대에 들어가 부장(副將)을 맡아 한산군내 각지에서 일본 헌병과 교전하였고, 음력 10월에는 임천군 입포(笠浦)에서 홍산재무서(鴻山財務署) 송주사(宋主事)의 징수 세금을 탈취하여 군자금으로 사용하였다. 11월 이후 노백인 의병장이 전라북도로 피신하자 이장준은 의병장을 이어받아 30~40여 명의 의병을 이끌고 1909년 음력 2월 이내에 임천군 군용동(郡用洞)·한산군 동상면(東上面) 나교(羅橋)·임천군 고죽동(高竹洞) 등 각지에서 군자금을 모금하고 밀정을 처단하는 등 항일투쟁을 전개하다 체포되었다.
이장준은 1906년 6월 21일 공주지방재판소(公州地方裁判所)에서 이른바 ‘폭동·강도·고살죄(故殺罪)’로 징역 15년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2017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최봉석
- 생몰연도 : 1883 ~ ?
- 본적 : 충남 비인 이방 동

1908년 음력 1월부터 3월까지 충남 서천(舒川) 등지에서 지석홍의진(池錫弘義陣)과 이소선의진(李笑先義陣)에 참여해 활동했다. 지석홍 의진은 충남 남포군(藍浦郡) 습의면(習衣面) 일원에서, 이소선 의진은 충남 보령군(保寧郡) 청라면(靑蘿面) 등지에서 활동하던 의병부대이다. 최봉석은 1908년 음력 1월 15일 지석홍의진에 참여해 6~7일 정도 활동했으며, 같은 해 음력 2월 9일 이소선의진의 서기(書記)로 충남의 노포(蘆浦)ㆍ비인 등지에서 5~6일간 활동하다가 귀향했다. 그후 음력 3월 16일에 다시 이소선의진에 참여하던 중 일본군의 습격을 받고 귀향했다가 체포됐다. 1908년 8월 22일 공주구재판소에서 이른바 폭도수종죄(暴徒隨從罪)로 태(笞) 100도(度)를 받았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5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했다.

◆최정식
- 생물연도:1871-1942
- 충청남도 서천 한산 용산 115

1905년 4월 한인 1,033명과 함께 멕시코로 노동 이민을 떠났다. 5월 멕시코 유카탄주 메리다에 도착하여 에네켄농장에서 4년간 강제 노역하였다.
1909년 5월 미주 국민회 북미지방총회 산하에 메리다지방회(美利多地方會)를 설립하고 평의원이 되었으며, 6월에는 학무, 8월에는 대의원, 1910년에도 대의원으로 선임되어 활동하였다.
1911년 12월 와하케뇨에서 에네켄농장의 노동자를 모집하자 동 지방으로 이주하였다. 1912년 1월 대한인국민회 와하케뇨지방회(五岳基那地方會)를 설립하고 법무로 선임되었다. 1913년에도 법무로 활동하였다.
1917년 멕시코혁명의 와중에 와하케뇨가 전쟁터로 변하자, 다시 메리다지방회로 이전하였다. 메리다지방회에서 1917년 10월 법무, 1919년 서기·수전위원(收錢委員), 1922년 학무, 1923년과 1924년에는 법무로 활동하였다. 1923년 3.1절 기념식에서 헌법을 낭독하였다. 1925년 3월에는 푸론테라지방회 주최로 열린 3.1절 기념식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다.
1937년 3월 코앗사 코알코스에서 3.1절 기념경축식을 거행하고 「삼일운동의 역사」에 대해 설명하였다. 1939년 3월 코앗사 코알코스지방회 감찰위원으로 선임되었다. 동 지방회 주최 3.1절 기념식에서 조선 독립선언의 논리에 대해 연설하였다. 8월 국치기념식에서는 「국치기념사」를 연설하였다.
1940년 동 지방회 대표원으로 선임되어 3.1절 기념식에서 연설하는 등 여러 차례 한국독립운동에 관해 연설하였다. 1941년에도 감찰위원으로 선임되어 활동하였다. 1917년부터 1941년까지 여러 차례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하였다.
정부는 2017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허완 
- 생몰연도 : 1880
- 본적 ; 충남서천군 화양면 창외리

1919년 3월 29일 충남 서천군(舒川郡) 마산면(馬山面) 신장리(新場里) 장터에서 기독교인 송기면(宋基勉) 등이 주도한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하였다.
송기면은 이날 오후 1시경 장터에 모여드는 군중들에게 태극기를 나누어 주고 단상에 올라가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다음 독립만세를 외쳤다. 그는 군중 2,000여 명과 함께 이에 호응하여 독립만세를 부르며 시위행진에 들어갔다. 일본 경찰은 시위 군중을 제지하며 송기면 등 6명을 연행하였다. 분노한 군중은 경찰 출장소를 습격하여 6명을 구출한 후 그곳을 부수기 시작하였다. 이때 경찰이 총을 쏘아 2명이 부상하였다. 군중들은 더욱 격분하여 한산(韓山) 쪽으로 만세시위를 계속하다가 일경의 총탄 발사로 해산되었다.
허완은 이날의 만세시위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일경에 체포되어 1919년 4월 15일 서천경찰서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태(笞) 90도(度)를 받았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9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이오길
- 생몰연도 : 1894~1943
- 본적 : 충남 서천 화양 다고, 주소:중국 요년 안동 육도구 남이조통1


(공훈록 미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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