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모시장터 / 아버지의 채찍
■ 모시장터 / 아버지의 채찍
  • 신웅순 칼럼위원
  • 승인 2021.03.11 11:00
  • 호수 104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내게는 아버지가 만들어준 방패연 하나가 있었다. 어렸을 적 내 키만 했던 짱짱하고 튼실한 연이었다.

아버지와 뒷산을 올랐다. 찬바람이 불었다. 연 띄우기에 알맞은 바람이었다. 아버지는 멀리 연을 날렸다. 내게 연줄을 쥐어 주었다. 바람이 세어 딸려갈 것만 같았다. 연줄을 놓칠까봐 아버지는 말뚝을 박고 거기에 얼레를 고정시켜주었다. 바람이 세게 불면 연은 위잉윙 소리를 내며 높이 올라갔고 잦아지면 쉬이 소리내며 낮게 내려왔다. 연은 긴 포물선을 그리며 올라갔다 내려갔다를 반복했다. 그날은 날이 매우 추웠다. 아버지는 추울세라 내 등 뒤에 수숫단, 볏짚 몇 단을 바람막이로 세워주셨다. 오붓한 보금자리가 만들어졌다.

아버지 잠깐 다녀올게. 놀고 있어.”

나는 바람이 잦아질 땐 연줄을 당겨야 하고 바람이 불 때는 풀어주어야 한다는 것을 거기에서 익혔다. 이를 몇 번 실행해 보았더니 자신이 생겼다. 꽤 오랜 시간을 연습하며 연과 함께 놀았다.

저녁쯤 되어 함박눈이 오기 시작했다. 겨울은 해가 바빴다. 멀리서 연은 함박눈을 맞고 있었다. 함박눈 때문에 연은 희미해져갔고 어둠 때문에 연은 더욱 멀어져갔다. 연은 먼 불빛인 듯, 먼 별빛인 듯 희미하게 하늘에 떠 있었다. 아버지가 만들어주신 연은 세상에서 가장 멀리 있었고 가장 높이 있었다.

 

우주에서 설움이 되어 놓쳐버린 방패연

봄비도 바람도 건너지 못하는 곳
별들도 기러기 울음도 건너지 못하는 곳

새벽하늘 넘었을까
서녘 하늘 넘었을까

어딘지 지금도 몰라
가슴에서 달이 뜬다

-방패연노토

 

아버지와 함께 띄웠던, 하늘에 떠 있던 그 연은 어디로 갔을까. 두루미를 따라갔을까, 함박눈을 따라 갔을까. 우주에서 아득히 놓쳤을 방패연.

봄비도 바람도 건너지 못하는 그곳에서 설움이 되었을까. 별들도, 기러기 울음도 건너지 못하는 그곳에서 하마 그리움이 되었을까. 새벽 하늘도 넘었고 서녘 하늘도 넘었을까. 어딘지 몰라 지금도 가슴에선 달이 뜨는 것이다.

아버지는 억수같이 비가 쏟아지는 날 먼 길을 떠나셨다.

그 때 내 나이 서른이었으니 사십년이나 되었다.

꿈을 꾸었다.

저녁때쯤이었다. 아버지의 그림자가 십리 정도는 길었다. 내게 말을 건넸다.

나하고 저승에 가자.”

아버지, 저승이 얼마나 먼데 왜 아버지를 따라갑니까. 저 못갑니다.”

단칼에 거절했다. 쓸쓸히 돌아서는 아버지의 뒷모습을 보고 나는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이후 아버지는 꿈 속에서도 오랫동안 나타나지 않으셨다. 혹여라도 오시면 멀리 떨어져서 한마디 말도 없으셨다. 삼십대 초반이었는데 어찌 꿈 속에서라도 아버지를 따라 저승으로 간다고 했겠는가.

인생을 잘 살지 않으면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연이 포물선을 그리며 날듯 내 인생도 몇 번의 부침이 있었다. 그 때마다 멀리 높이도 떴던 아버지가 만들어주신 방패연이 생각났다. 내 젊은 시절은 바람 부는 겨울 하늘이었다. 산이 없는데도 초승달은 떴고 들이 없는 데도 그믐달은 떴다. 아버지의 따뜻한 체온이 아직도 남아있었던 것일까.

아버지가 잠시 비우고 간 사이에 바람 불면 풀어주고 바람 잦으면 당겨야 한다는 그 때 어렸을 때 연에서 익혔던 지혜였는데 나는 세상을 살면서 그렇게 살지 못했다. 이후 반세기도 훨씬 넘은 칠순의 나이에 다시금 깨달았으니, 당기고 푸는 그 쉬운 일차 방정식조차도 풀지 못했으니 인생이란 이렇게 미련하고 어리석은 것이다.

아버지는 그냥 먼 길을 떠나신 게 아니었다. 채찍을 놓고 떠나신 것이었다. 다만 나는 사십여년 동안 그것을 찾지 못했을 뿐이었다. 방패연은 내게 때로는 외나무다리였고 징검다리였던 보이지 않는 채찍이었다. 나는 무엇이든 물건을 잘 찾지 못했다. 그리고 길치이기도 했다. 내 인생도 마찬가지였다. 언제면 나는 이런 미련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