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획취재 / 금강권역 사라진 포구를 찾아서 (3)예산군 구만포
■ 기획취재 / 금강권역 사라진 포구를 찾아서 (3)예산군 구만포
  • 허정균 기자
  • 승인 2021.06.24 09:18
  • 호수 106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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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포평야 교통·문화의 중심지 구만포

독일상인 오페르트 남연군묘 도굴 시도 상륙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구만포 부근 지형도
▲구만포 부근 지형도

삽교천은 홍성군 장곡면 오서산(791m)에서 발원해 북쪽으로 흐르며 홍성군 홍동면의 중심부를 뚫고, 홍성읍, 금마면, 내포 신도시가 있는 홍북면을 지나 예산군 삽교읍에 이른다. 이어 예산군 신암면과 당진시 합덕읍의 경계를 이루어 북으로 흐르다 하구 부근에서는 아산시와 당진시의 경계를 이루며 아산만으로 흘러든다.

1979년 삽교천 방조제가 완공되기 전까지 총 길이 61km의 삽교천 중간에 위치한 삽교읍에까지 바닷물이 드나들었다. 삽교천 중하류부에 넓은 평야가 발달했는데 이를 내포평야라 한다. 내포평야는 예산과 당진에 걸쳐 넓게 발달되어 있기 때문에 예당평야라고도 불린다. <택리지(擇里志)>에 내포(內浦)는 가야산 둘레의 10(十縣)을 가리킬 정도로 넓은 지역을 포함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지금도 내포는 삽교읍 하포리의 자연마을 이름으로 남아있다.

▲1970년대 지도에 표기된 구만포 부근 내포마을
▲1970년대 지도에 표기된 구만포 부근 내포마을

삽교천 양안에 발달한 퇴적평야는 주로 논으로, 그 주변의 침식 구릉지는 밭·과수원·목장 등으로 이용되고 있다. 2008년 기준 경지율은 예산군이 34.23%, 당진시 40.96%로 매우 높은 편이다.

구만포는 삽교읍에서 삽교천을 따라 6km쯤 하류에 있다. 행정구역으로는 예산군 고덕면 구만리(九萬里)이다. 구만포구 기념공원에 있는 안내판에는 구만리란 후미지에 있는 명당지, 즉 좋은 땅이란 뜻이라고 풀이해놓았다.

구만포는 조선시대에 내포의 교통문화 중심지였다. 인근의 쌀 등 곡식을 실어내가고 서해 각지에서 해산물이 몰려들던 곳이었다. 전라남도 완도에서 새우젓배가 오기도 했다고 한다. 지금도 구만리 마을 가정집 장독대에서는 새우젓독 한두 개쯤 쉽게 볼 수 있다.

▲구만포 포구에 정박한 어선. 1956년도
▲구만포 포구에 정박한 어선. 1956년도

새우젓배가 들어오면 인근에서 사람들이 모여들어 번화한 저잣거리가 형성되었다. 마을 장정들은 새우젓배가 들어오면 이를 하역하는 일을 맡아 돈을 벌었다.

이때 삽교천 물은 그대로 퍼서 주민들의 식수로 사용되었다. 비중이 높은 바닷물이 바닥에 깔리고 위에 뜬 강물을 떠서 사용했다 하니 강이 얼마나 깨끗했는지 알 수 있다.

여름에 큰 비가 내리면 만조와 겹치며 삽교천은 범람하기 일쑤였다. 강폭을 넓게 잡아 제방을 쌓아나갔다. 그러나 백중사리 때 이마저도 넘쳐 포구 전체가 물에 잠기기도 했다. 면사무소 직원이 나와 인근 야산으로 대피하라고 재촉하기도 했다고 한다.

삽교천 방조제의 완공으로 이러한 침수 피해는 사라졌지만 주민들의 삶과 문화는 통째로 바뀌었다.

▲구만포 옛포구 자리. 공사중인 서해선 철도가 구만포를 지나고 있다.
▲구만포 옛포구 자리. 공사중인 서해선 철도가 구만포를 지나고 있다.

독일 상인 오페르트는 1866년 당진시 대호지면 조금리에 나타나 조선과의 통상을 요구했다. 통상 요구가 거절되자 그는 병인박해 때 중국으로 탈출한 프랑스 신부 페롱을 길라잡이로 삼아 중국인, 말레이인 선원 140여 명을 차이나호에 승선시키고, 18684월에 충청도 덕산군 구만포에 상륙했다. 조상 숭배의식이 강한 조선의 전통을 악용해 당시 집정자이던 흥선대원군의 아버지 남연군의 묘에서 유골을 파내어 협상을 하려는 계획이었다.

이들은 관아를 습격해 군기를 빼앗고 건물을 파괴해 도굴에 필요한 장비를 챙긴 다음 남연군의 무덤으로 직행해 밤중에 도굴을 시도했다. 그러나 예상치 못한 석회로 만든 관을 맞딱뜨려 실패했다. 이들은 성난 조선의 민중이 두려워 썰물이 되어 뱃길이 끊어지기 전에 서둘러 도망쳤다.

이 사건 후 조선에서는 서양 열강에 대한 강경한 거부 정책을 폈다.

▲구만포 기념공원. 나루터가 있던 곳에 조성해놓았다.
▲구만포 기념공원. 나루터가 있던 곳에 조성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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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민 인터뷰

완도에서도 새우젓 배가 왔었다

▲구만포에서 주민과 인터뷰하는 주용기 시민기자
▲구만포에서 주민과 인터뷰하는 주용기 시민기자

예산군 고덕면 구만리로 찾아가서 이곳에 사시는 어르신(1944년생. 여성)을 만나 얘기를 들었다.

- 어디에서 시집을 오셨고, 자녀분들은 몇이나 두었습니까?

= 내가 산골에서 시집을 왔잖아요. 내가 결혼을 스물세 살에 했어요. 결혼을 한 해에 대해 정확한 것은 결혼 사진을 봐야 해요. 당진시 면천에서 살다가 왔어요. 지금은 당진시 순성면 양유리에요. 나 여기로 시집온 지 50년이 넘었어요. 시집을 와서 농사를 졌어요. 4남매를 낳았어요. 아들 셋, 딸 하나. 다 서울 가서 살아요. 지들이 공부 잘 해서 다 대학 나와서 잘 살아요.

- 삽교방조제와 여기 제방은 언제 만들었는지 기억나십니까?

= 방조제를 박정희 정권 때 만들었지유. 사느라고 어려워가지고 몇 년도에 만들었지 모르겠어요. 여기 (삽교천) 뚝방은 내가 작년 10월에 시집을 왔다면 올해 봄부터 뚝방 공사를 했어요. 시집오고 나서 바로 공사를 했어요.

- 예전에 바닷물이 여기 근처까지 들어왔습니까?

= 이곳이 갯물이 들어오던 냇가에요. 우리 애들 낳아서 애들이 초등학교 다닐 때 학교 갔다 오면 거기(갯가에) 가서 놀고 그랬어요. 바닷물이 들어 오니께 (개흙이) 아무것도 없고 매끈매끈 했어요. 그때 여기는 농경지가 없고 다 갯고랑이었지. 이곳까지 바닷물이 들어왔다 나갔다 했지. 삽교천 (방조제를) 막고 나서 물이 안 들어오지.

- 바닷물이 여기까지 들어왔을 때 나루터가 있었습니까?

= 저기가 나루터였는데 없어졌어요. 옛날에는 새우젓배가 들어왔던 뱃턱이 있어서 큰 배도 들어오고 그랬어요. 완도같은 데서 (새우젓을 실은) 배들이 왔어요. 여기에는 어업을 하는 사람들은 없었어요. 여기는 (새우젓을) 받아서 장사하고 그랬어요. 새우젓배가 들어오면 멀리서 사람들이 새우젓을 사러 왔어요. 우리 친정집이 있는 면천에서도 걸어서 왔어요. 여기서 직전 거리로 한 20(8킬로미터)가 됐어요. 우리 어머니들이 우리들 먹일라고 고생을 많이 했어요. 덕산, 합덕 이런데서 오기도 했어요. 옛날에는 옹기그릇에 (새우젓을) 담아서 (머리에) 이고 가다가 깨지고 그랬어요. 그래서 물통을 가지고 와서 담아가고 그랬어요. 우리 집에 가지고 있던 옹기그릇을 최근에 1만 원에 열댓 개 팔고 했는데 이쁜 것은 팔지 않고 그대로 가지고 있어요. 그때 새우젓 가격은 몰라요. 영감님이 알았죠. 배는 삽교읍까지도 올라가고 그랬어요.

- 뱃턱과 나룻터가 있던 자리는 어디입니까?

= 내가 시집을 온 그 뒤로도 나룻터랑, 뱃턱이 한참 더 있었죠. 뱃턱은 나룻터보다 먼저 없어지고 그랬어요. 나룻터는 이 다리를 놓으면서 없어졌어요. 뱃턱은 철길다리 밑에고, 아무런 흔적이 없어요.

▲구만교
▲구만교

- 당시에 새우젓 배들이 들어올 때 남편 분은 무엇을 하셨습니까?

= 그때는 우리 영감들이 청년이었잖아요. 배에 도라무(드럼통)으로 새우젓을 싣고 오면 넷(네명) 씩이 배에서 도라무를 배에서 내리고 했어요. 그런 부업이 있던 거죠. 낮에는 농사짓고 밤에는 그런 거 하고. 짐 부리고 품값 먹는 거죠. 경로당가면 사진이 있을 거요. 우리 영감(남편) 님이 가지고 있던 사진을 다 구덕1리 경로당에 줬어요. 여기가 구덕1리로 들어가요. 뱃턱은 구덕3리로 들어가죠.

- 예전에 비가 많이 올 때 침수피해가 많았습니까?

= 비가 많이 올 때는 장독이 둥둥 떠다니고 그랬어요. 비가 오면 다 바다였어. 그래서 당시에 소를 몇 마리 키웠어요. 애들 가르치느라고. 물이 많이 차면 (소를 몰아서) 구만리 경로당 옆 언덕으로 올라가고 그랬어요. 거기까지는 물이 안 차니까요. 지금은 많이 살아봐서 어지간히 (비가) 와서는 괜찮은데 너무 많이 올 때는 면에서 (사람이) 나와서 떠내려온다고 어서 올라가라고 했어요. 다리를 놓은 이후에는 우리 주인 양반(남편)이 저기 다리로 올라가서 거기를 안 가. 거기 다리에서 밤새고 그랬어요.

- 바닷물이 여기까지 들어올 때는 무엇을 잡았습니까?

= 섬진강에서 나오는 거, 재첩, 그런 것을 막 잡아다가 먹고. 재첩이 많이 나왔어요. 물도 깨끗허고. 여기 샘물은 바닷물이 들어와 갖고, 감주(식혜) 만들려고 하면 갯물 퍼다 허다 그랬어요. 샘물로 감주를 만들면 새까맸어요. 갯물을 퍼다가 먹기도 하고, 빨래도 하고. 그때는 갯물이 깨끗하고 맑았어요. 장어도 많이 나와서 잡고 그랬어요. 참게도 많이 나와서 잡아다 먹고. 여기 아쉬운 게 없었어요, 여기 갯골랑이. 그 개흙이 마사지 할 정도로 좋았어요. 미꾸라지를 막 손으로 잡고, 그때가 좋았어요. 봄에 뱀장어 새끼를 잡았어요. 모기장 사다가 미싱으로 만들어가지고 잡고 그랬어요. 가을에는 뱀장어 큰 것을 잡고, 우리 영감이 고기 잡는 선수였어요. 우리 영감님이 돌아가신 지 3년 됐어요. 암은 못 고치더라고. 대장암, 늦게 수술을 해가지고. 고생하면서 한 2년 살다가 돌아가셨어요,

- 여기 삽교천 제방에 천주교와 관련된 안내판이 있던데 왜 그렇습니까?

= (천주교) 신부들이 삽교읍에서 당진시 합덕읍으로 가던 길이래야. 그래서 말뚝에 표시를 해놨데요.
 

▲구만리 한 가정 장독대에 남아있는 새우젓독
▲구만리 한 가정 장독대에 남아있는 새우젓독

<주용기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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