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획취재 / 금강권역 사라진 포구를 찾아서 (4)당진시 당진포
■ 기획취재 / 금강권역 사라진 포구를 찾아서 (4)당진시 당진포
  • 허정균 기자
  • 승인 2021.06.30 17:02
  • 호수 106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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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시대 당나라 오가던 나루터 당진포

대호방조제로 7개면 어촌 마을 사라져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1930년대 충청남도 북부해안
▲1930년대 충청남도 북부해안
▲충남 북부해안 지형도(현재)
▲충남 북부해안 지형도(현재)

1970년대에 축조된 아산방조제와 삽교천방조제에 이어 1980년대에 충남 북부 해안에 대규모 방조제 축조 공사가 시행되었다. 1981년에 착공한 대호지구 방조제와 1987년에 착공한 석문지구 방조제 공사가 그것이다.

이 두 방조제의 완공으로 해안선의 드나듦이 극심한 충남 북부해안은 자로 잰 듯한 직선의 해안선으로 바뀌었다.

1985년 대호지만 입구를 봉쇄한 대호방조제의 완공으로 당진시 석문면, 고대면, 정미면, 대호지면과 서산시 성연면, 지곡면, 대산읍의 바닷가 마을에서 어장이 사라졌다. 호미 한 자루만 있으면 바지락, 굴이 지천이던 갯벌에 나가 이를 채취해 풍성한 갯살림이 가능했다. 배를 타고 멀리 나갈 필요도 없이 만으로 회유해 들어오는 고기떼를 포획했다. 당진시 고대면 당진포리는 그 가운데 하나이다.

서산시 성연면 명천리에서 출항한 여객선이 대호지만 안의 출포, 대호지 나루터, 당진포 등의 여러 포구를 거쳐 인천으로 오갔다. 인천까지 두 시간 반이면 닿았다 한다.

당진시 대호지면 사성리 옛나루터 근처에 사는 권길렬(1950년생)씨를 만나 얘기를 들었다.

여기가 뱃터에요. 매표소도 있었고, 인천으로 다니는 여객선이 있었어요. 여기 사람들이 인천으로 유학을 많이 갔어요. 그래서 인천이 여기 서산, 당진 사람들이 많아. 예전에는 육지로 해서 인천을 가려면 6시간, 7시간 걸렸으니까. 배로는 2시간 걸렸어요. 여기가 그 전에 바닷고기가 많이 나왔어요. 바지락, 굴이 지천이었어요. 방조제 막고 수질이 안좋아 녹조가 생겨요. 돼지를 키우는 돈사가 많아요

▲대호지면 사성리 대호지나루터 자리에 있는 양수 펌프장
▲대호지면 사성리 대호지나루터 자리에 있는 양수 펌프장

고대면 당진포리에 있는 당진포는 신라시대에는 당나라와 교류했던 곳이다. 이에서 당진(唐 津)이란 지명이 비롯됐다. 한편 신라의 원효대사가 당나라 유학을 결심하고 배를 타려고 했던 곳이 당진포 부근이었을 것이라고 추측하는 역사학자들도 있다. 당진포진성은 지난 1999년 충남도 문화재자료 365호로 지정됐다.

▲당진시 고대면 당진포리 해창마을
▲당진시 고대면 당진포리 해창마을

1868년 남연군묘 도굴을 시도했던 독일 상인 오페르트가 18663월과 8월에 영국 상선 로나호를 타고 대호지면 조금리 조금진 나루터에 정박하며 통상을 요구했다. 조금리마을비에는 남연군 묘소 도굴 주범 오페르트 상륙 통상 요구한 나룻터라고 기록하고 있다.

▲당진시 대호지면 조금리 마을 유래비
▲당진시 대호지면 조금리 마을 유래비

<허정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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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민 인터뷰

고기 잡는 데 배타고 멀리 나갈 필요 없었다

▲당진포리 해창마을 주민 고창세씨
▲당진포리 해창마을 주민 고창세씨

당진시 고대면 당진포리 해창마을에 주민 고창세(1947년생) 어르신을 만나 얘기를 들었다.

- 이곳에서 태어나셨습니까?

= 여기서 태어났죠.

- 예전에 바닷물이 어디까지 들어왔습니까?

= 이 앞에까지 바닷물이 들어왔어요. 아침 밥하기 전에 망둥어 낚시를 해가지고 반찬으로 먹고 그랬어요.

- 당시에 주로 어업을 하셨습니까?

= 농사를 지으면서 어업을 많이 했어요. 숭어, 꽃게, 복어, 대하, 전어, 상어, 가오리를 잡았어요. 상어가 사람 키 정도 크기가 잡혔어요. 이빨이 선 게 하니라 도돌도돌 한 정도여서 안 물리는 거여. 상어, 가오리는 뱃 속에서 새끼가 나오더만. 그런 것을 잡아다가 중간 수집상에다가 팔았죠. 맨손어업으로는 주로 바지락, 소라, 꽃게, 칠게 같은 것을 잡았어요.

- 모래와 뻘이 모두 있었습니까?

= 저 물가에는 모래고, 여기 가까운 곳은 뻘이고 그랬어요. 복어 산란지가 여기였다고. 까치복어가 엄청 껏지.

- 배를 타고 멀리 나가서 어업을 하지는 않았습니까?

= 굳이 나갈 필요가 뭐가 있어. 여기 앞에서 주로 어업을 했어. 몇 번 안했지만 연평도도 가서 어업을 하기도 했어. 그때는 먹고 살기가 어려운 게, 쪼끔씩 그물을 매 가지고 잡고 그랬어. 그 당시는 갈치랑 이런 것이 많았어.

▲1930년대 지도에 나온 당진포
▲1930년대 지도에 나온 당진포

- 대호방조제는 언제 막았습니까?

= 1985년돈가 막았지. 전두환 때였어.

- 방조제 공사를 할 때 주민들이 반대를 하지 않았습니까?

= 그때는 뭐가 뭔지 몰랐지. 정부에서 하는 것은 다 거짓말 아니여. 이것을 막을 때 가구당 9천 평씩 나누어 준다고 했다고. 그런데 분양을 받은 사람은 받고, 못 받은 사람은 못 받았지. 그때만 해도 말로만 9천 평 씩 준다고 설명을 해놓고 안줬어. 나중에 분양을 하는 것이 까다로운 거여. 분양으로 2,400평인가, 2,500평인가를 나누어 주는데 10년인가 몇십 년 상환하는 것으로 해서 작년도인가 재작년도까지 다 끝났을 거여. 농어촌공사가 관리를 했지. 지금도 상환을 다 했는데도 저당 잡힌 땅을 풀어주지 않고 있어. 이자도 비싸요. 원금하고 이자를 같이 갚아야 하니까 힘들었지. 이자가 변동이 아니고 고정이여. 예전에는 이자가 높았는데 그대로 변동없이 받아 갔어. 농어촌공사가 분양을 안 해주고 남겨둔 곳도 많아요. 변두리 땅들은 비싸게 분양받고 했어요. 그리고 이 앞에 땅은 우리가 논을 만들어서 사용하고 그랬는데 방조제를 막고 나서 (돈으로 지불하고) 불하받아 가라고 했어요. 농사지을려고 농업용수를 받아갈 때 불편해요. 여기 대호호는 농어촌공사와 수자원공사가 함께 관리하고 있어서 불편해요. 대산공단에서 공업용수를 많이 가져가는데 그곳에서만 안 가져가면 이 물만으로도 농사용 물로는 충분해요. 그 공업용수를 수자원공사가 관리를 해요.

- 여기에서 당진읍까지 거리가 얼마입니까?

= 15km(킬로미터) 될거요. 자전거를 타고 1시간 정도 걸릴 거요.

- 여기 사람들은 인천으로 많이 다녔습니까?

= 여기 사람들은 학교를 당진으로 다니지 않고 인천으로 가고 그랬어요. 그래서 여기 사람들은 인천 출신들이 많아요. 육지로 가려면 12시간이 걸렸어요. 배로는 2시간 반이 걸렸어요. 서산시 성연면 명천리에서 출발해서 이곳 해창에 들렸다가 난지도로 해서 인천을 갔다가 왔다가 했어요. 이곳에서 쌀, 콩 이런 것을 엄청 싣고 다녔어요. 배가 컷고, 목선이었어요. 당진시내 사람들은 보덕포로 해서 배를 타고 다녔어요.

<주용기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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