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획취재/금강권역 사라진 포구를 찾아서 (10)세종시 ‘부강’
■ 기획취재/금강권역 사라진 포구를 찾아서 (10)세종시 ‘부강’
  • 허정균 기자
  • 승인 2021.09.09 08:05
  • 호수 107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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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금배 닿던 부강포구…신도시 개발로 흔적없이 사라져

미호천 뱃길 끝지점에 있는 마한시대 유적 정북동토성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금강 본류와 미호천 합류지점
▲금강 본류와 미호천 합류지점
▲미국인 선교사가 촬영한 부강포구
▲미국인 선교사가 촬영한 부강포구
▲부강포구가 있던 곳
▲부강포구가 있던 곳

충북 영동과 옥천의 사간지대를 빠져나온 금강 본류는 대전시 신탄진을 지나 대둔산에서 발원한 갑천을 만나고 다시 흘러와 세종시 합강리에서 금강의 최대지류인 미호천을 만나게 된다.

합류지점에서 약 4km 상류에 있는 세종시 부강면 부강리는 옛날에 포구로 번성하던 곳이었다.

부강포구는 강경에서 약 80km 상류에 있지만 이곳까지 배가 닿았다. 강을 거슬러 배가 올라가는 금강의 소강종점(溯江終點)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더 작은 배로 갈아타고 더 상류로 거슬러 올라갔다 한다.

일본 외무성 통상국에서 발간한 자료에 따르면 1890년대까지는 부강포구 상류에도 100석 이하의 선박이 다닐 수 있었다는 것이다. 충남문화원의 연구에 따르면 18851월부터 약 4년에 걸쳐 철도부설을 위하여 사전에 지형을 탐사하였던 일본인 기사(技師) 송전행장(松田行藏)의 탐사기록에서 1880년대 이전 물이 많을 때에는 금강 본류를 따라 대청댐보다 상류에 위치한 옥천과 영동까지도 50석을 실은 배가 올라갈 수 있었으며, 합강리에서 미호천을 따라 직선거리 약 25지점에 위치한 오근장(충북 청주시 상당구 오근장동)까지 선박이 왕래했다. 그런데 1900년대 초반 이후 수량이 감소하고 토사가 퇴적하면서 부강포구 상류의 뱃길이 마비되었다.

파도를 헤치며 나아가는 바닷배는 대개 조수가 닿는 곳까지 운항했다. 금강에서 조수가 닿는 끝지점은 부여의 규암포였다. 상류로 올라갈수록 수심이 얕아지기 때문에 바닷배가 닿는 끝지점부터는 바닥이 평평한 강배가 오갔다. 조선시대 기록에 의하면 조수의 영향이 미치는 구간을 경계로, 물 아래[水下]와 물 위[水上]로 구분하였고, 그 선박 또한 수하선(水下船)과 수상선(水上船)으로 구분했다. 지금의 기준으로 보면, 물 아래는 대체로 하천 하류로 분류하는 구간과 일치한다.

조선시대의 기록을 찾아보면 공주와 부강 사이에도 소규모의 포구는 여러 곳에 있었다. 그 가운데 나리진은 1720년 진휼청에서 금강 상류의 주민들이 물고기와 소금[魚鹽]을 얻기 편하게 하기 위하여 공주와 연기의 경계 지점에 있는 나리포(羅里舖)를 개설했던 곳이다. 해방 이듬해인 19466월 홍수로 마을 전체가 완전히 사라지면서 다시 용포리로 이설되었다. 세종시 금남면 용포리는 현재 세종시 시청이 있는 부근이다. 세종시 금강변은 공원이나 산책로로 조성되어 있으며 번성했던 포구자리는 흔적도 찾을 수 없다. 옛날 포구였음을 알리는 빗돌 하나도 찾아볼 수 없었다.

1번 국도가 금강을 건너는 곳에 나루터가 있었다. 새나루라 불렀다. 그러나 새나루는 근처 아파트단지의 이름으로 남아있다.

▲새나루 나루터 자리에 놓인 다리. 1번 국도가 지나간다.
▲새나루 나루터 자리에 놓인 다리. 1번 국도가 지나간다.

조선시대에 부강포구에서 더 작은 배로 갈아탄 소금이나 생선은 미호천을 거슬러 청주 오근장까지 올라갔다. 대동여지도에 오근진(梧根津)까지 뱃길이 표시되어 있다. 오근진까지 배로 올라왔던 소금은 봇짐장수의 지게에 얹혀 박달재를 넘어 충주 남한강 변에 있는 목계장까지 갔을 것이다.

뉴스서천 취재팀은 3일 미호천을 따라 청주시 오근장동을 찾았다. 충북선 오근장역이 있다.

충북선은 일제강점기 당시에 사설철도회사인 조선중앙철도주식회사에 의해서 조치원 - 청주간이 1921년에 첫구간이 개통됐는데 이 구간은 부강포구-오근진까지의 뱃길을 대체한 것이다. 원래는 충북경편철도주식회사에서 제천-충주-청주-부강 노선을 부설하려 하였는데 조선중앙철도와 충남 쪽에서 청주-조치원-공주 노선을 들고 나오자 총독부의 중재 하에 충남쪽의 의견대로 결정됐다 한다. 일제 당시 충주까지 연장되어 운행했으나 이 때 계획된 조치원-공주 계획은 이행되지 않았다.

▲충북선 오근장역
▲충북선 오근장역
▲대동여지도에 나타난 오근진.
▲대동여지도에 나타난 오근진.

오근장에서 미호천을 따라 부강까지의 뱃길을 말하는 사람을 찾을 수 없었다. 청주시 청원구 정북동에 사시는 한 어르신(94)을 만나 얘기를 들었다.

- 금강하류에서부터 소금배가 오근장까지 들어왔다는 말을 들어온 적이 있습니까?

= 전설에도 그런 말을 아예 못 들어봤어. 금시초문이여

▲정북동토성. 정사각형 모양이며 둘레는 675m이다. 미호천 뱃길이 닿는 끝부분(소항종점)에 있으며 1970년대에 옆에 있던 해발 30여미터의 동각산은 헐려 논으로 바뀌었다.
▲정북동토성. 정사각형 모양이며 둘레는 675m이다. 미호천 뱃길이 닿는 끝부분(소항종점)에 있으며 1970년대에 옆에 있던 해발 30여미터의 동각산은 헐려 논으로 바뀌었다.
▲미호천
▲미호천

다만 오근장 미호천변에 마한시대의 토성이 남아있어 먼 옛날부터 뱃길이 닿던 곳이었음을 짐작케 해주고 있다. 사적 415호로 지정된 정북동토성이다. 성벽 둘레 675m의 정북동토성은 현존하는 토성 가운데 가장 보존상태가 좋으며, 고대 중국식 네모 모양 토성의 형태를 갖추고 있어서 일찍부터 주목을 받아 왔다.

상당산성에 있는 궁예를 공격하기 위해 견훤이 이 토성을 이용했다고 하는데 본래의 목적은 미호천의 소강종점으로서 군사적으로도 요충지였기 때문에 평야 한가운데에 토성을 쌓은 것으로 짐작된다.

마을 주민에 따르면 이 토성 동쪽에 동각산(東角山)이라는 해발 30여미터의 낮은 산이 있었다 한다. 그런데 이 토지 소유주가 1970년대에 이 산을 헐어 논으로 만들었으며 과정에서 무수한 고인돌이 나왔다고 말했다. 그래서 토지주는 문화재법 위반으로 수감생활을 하기도 했다고 전했다.

동북동 토성 옆에 동각산이라는 작은 산이 있었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다.

 

주민 인터뷰

부여까지 가서 소금 실어왔다

▲98세의 이옥분 어르신
▲98세의 이옥분 어르신

부강포구 강 건너편 세종시 금남면 부용리에 사시는 이옥분(98, 돼지띠) 어르신을 만나 얘기를 들었다.

 

- 강경까지 가서 배에 소금을 실고 오고 그랬는지 알고 계십니까?

= 옛날에 동네 할아버지들이 부여까지 배를 가지고 가서 소금, 새우젓을 띠어다가 (실어)오고 그랬어. 여기 와서 그것을 지게에 짊어지고 다면서 팔고 그랬어. 나무통에 담아가지고. 마을배는 금락정밑에 두고 그랬어.

- 원래 마을 이름을 부용이라고 했습니까?

= 원래는 이 마을이 부용이 아니고, ‘빙이라고 불렀어.

청주오근장까지 배가 다녔다

세종시 금남면 부용리에 살면서 식당을 운영하시는 육원근(1954년생)씨를 만나 얘기를 들었다.

- 마을에 사신지 얼마나 되셨습니까?
= 고향은 아니지만 여기에 와서 산지 한 20년 됐어요.
- 마을에 나루터가 있었습니까?
= 마을 앞에 나룻배로 강을 건너다녔데요. 여기 마을 애들이 다니던 학교가 건너편에 있는데(현 부강초등학교) 비가 많이 오면 못 건너가고 그랬더라고 하데요.
- 강경에서 소금배가 여기까지 왔습니까?
= , 여기까지 왔고, 마을 사람들이 소금을 날랐다고 그래요.
- 다시 청주 오근장까지 소금을 실어 나르는 배가 있었다고 합니까?
= , 오근장까지 갔다고 그러더라고요. 마을에 98세 되신 할머니에게서 들었어요.
- 마을 앞 금강에서 어떤 물고기가 잡힙니까?
= 쏘가리, 붕어, 잉어가 잡혀요. 잉어가 팔뚝만 한 것이 잡히고 그래요. 주말에 낚시하는 사람들이 많이 와요. 고기는 많이 사는데 물이 깨끗하지 않으니까 많이 줄었지.
- 참게나 뱀장어는 잡힙니까?
= . 그전에는 참게가 많이 잡혔다고 그래요. 지금은 없지. 뱀장어도 안 잡혀요. - 이곳 주변에 새들이 많이 찾아옵니까?
= 철새들이 엄청 많아. 늦가을에 저녁때가 되면 몇십 마리씩 새들이 저리 가. 아침이 되면 다시 반대로 날아가. 엄청나게 많아. 아침에 올라왔다가 저녁에 내려가는 가 봐. 아침에는 우리는 못 봐요. 오리도 많고.
- 수해피해는 없습니까?
= 대청댐을 막아서 피해가 없데요. 예전에 마을이 둑(제방) 아래에 있었데요. 그런데 수해피해를 크게 입어서 마을을 이곳으로 이주시키고 둑(제방)을 높이 쌓았다고 하더라고요.

소금실은 배가 들어왔다고 들었다

세종시 부강면 부강리에 사시는 어느 어르신을 만나 얘기를 들었다.

- 예전에 마을 앞 금강변에 부강포가 있었다고 알고 계십니까?
= , 저기에 있었어요.
- 돛단배, 돛을 단 배가 들어오고 그랬습니까?
= , 들어오고 그랬어요. 소금 실은 배가 들어왔어요. 나는 보지 못했고, 아버지한테 들었어요.
- 원래 이 마을에서 태어났습니까?
= 강 건너 부용리에서 태어나서 이 마을로 이사를 왔어요.
- 강물이 많이 흐를 때는 어디까지 차고 그랬습니까?
= 해방된 해 다음해인 병술년(1946)에 이 바로 앞 논까지 강물이 들어오고 그랬어요. 장마에 강물이 넘쳐서 동네가 싹 떠내려가고 그랬어. 대청댐을 만들고 나서는 그이후로 강물이 (마을 앞까지) 안 들어와요.

토성 옆에 동각산이 있었다

청주시 청원구 정북동에 사시는 한재옥씨에게서 정북동토성과 주변의 변화에 대해 얘기를 들었다.
- 저기 토성 옆에 미호천이 흐르던 데 주변에 어떤 변화가 있습니까?
= 토성(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동각산이 있었어요. 동그란 것이 예쁜 산이 있었어. 동그랗다고 해서 동각산이라고 불렀어. 동각산이 토성과 연결되었었어. 마을 쪽으로는 경사가 완만해서 밭이 있었어. 그런데 평평히 파버리고 해서 논을 만들어 버린 거지. 당시에 이장이 파헤치다 보니까 거기서 고인돌이 엄청 나온 기여. 그러니까 문화재청하고 정부에서 걸어가지고 교도소로 집어넣은 거여. (이장) 양반이 죽은지 한참 됐지. 교도소 들어가 있는 거를 주민들이 탄원서 내서 나온 거거든.
- 그럼 동각산이 언제 없어졌습니까?
= 내가 고등핵교(학교) 때니깨(다닐 때니까). 50년 가까이 됐네. 그 동각산만 있었으면 토성과 연결되면서 좋았겠지. 요즘에 토요일, 일요일이면 젊은 애들이 토성에 오거든. 소나무에서 사진 촬영도 많이 하고, 전에 영화 촬영도 한번 했거든. 이게(동각산이) 있었으면 (사람들이) 더 왔지.

<주용기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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