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년 전 판교장터 억울한 희생자들
71년 전 판교장터 억울한 희생자들
  • 허정균 기자
  • 승인 2021.09.09 08:47
  • 호수 107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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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일 '미군폭격 희생자 위령제' 열린다
▲‘판교장터폭격희생자추모위령제’ 포스터
▲‘판교장터폭격희생자추모위령제’ 포스터

1950910일 판교 장날 미군폭격기의 기총사격으로 희생된 100여명의 희생자들에 대한 위령제가 오는 10일 오전 11시 판교장터에서 열린다.

71년 전 910일 오전 11시 무스탕이라 불리던 F51 미군기 2대가 나타나 장터 상공을 선회하더니 장터에 모여든 흰옷 입은 주민들을 향해 기총소사를 가해왔다. 순간 장터는 아수라장이 됐고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100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이날 현암리 장터로 몰려든 주민들은 인민군이 미군의 폭격에 대비 장을 열지 못하게 하자 판교국민학교 뒤 판교리와 복대리 가실마을로 옮겨가 임시장터를 열었다.

당시 많은 목격자들이 있었지만 이 엄청난 사건의 진상은 제대로 밝혀지지 않은 채 역사의 뒤안길로 묻히는 듯했다.

그러나 199910월 뉴스서천의 보도를 계기로 유가족 대책위원회가 구성되고 가족들의 억울한 죽음에 대한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요구하기에 이르렀으며 2010105일 진실화해위는 진실규명 신청에 대해 진실규명으로 결정했다.

당시 서천지역은 북한의 주공라인인 경부축선으로부터 서쪽으로 치우쳐 있었기에 미군이나 한국군이 방어전투를 실행하지 않았으며 해병대를 비롯한 지역경찰이 북한군 제6사단 13연대에 맞서는 정도로 상시 주둔한 대규모 인민군 부대는 없었던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그러나 미 제5공군의 F-51F-80은 도로상에 움직이는 차량과 병력의 파괴에 중요한 역할을 했고 북한군의 병력과 보급품이 촌락지역에 은닉됐다는 판단으로 인근 촌락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판교면 폭격사건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미군 문서로는 제18전폭단 소속 제67전폭대대의 1950910일자 임무보고서가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해당문서에 따르면 당일 1055분경 F-51 2대가 이륙하여 임무를 완수하고 1250분경에 착륙한 것으로 보고됐다. 이 시간 중 판교 임시시장에서 기총사격을 하며 머문 시간은 1130분부터 45분까지 15분간으로 판교리 동쪽으로 이동하던 소속 비행기 두 대가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장면을 목격, 기총소사로 100여명을 사살한 것으로 기록돼 대부분의 희생자 유족의 진술과 일치하고 있다.

이처럼 사건의 전모가 밝혀졌음에도 서천에서는 희생자 위령탑은 커녕 위령제 한번 지내지 않고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에 판교면 주민들이 나섰다. 주민들은 판교장터폭격희생자추모사업추진위원회’(위원장 신경섭)을 구성하고 오는 1011시 판교면 현암리 판교장터에서 판교장터폭격희생자추모위령제를 열게 된 것이다. 서천군과 판교면행정복지센터, 서천문화원, 뉴스서천이 후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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