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천지역 동학농민전쟁 유적·유물’ 등 토론
‘서천지역 동학농민전쟁 유적·유물’ 등 토론
  • 허정균 기자
  • 승인 2021.12.02 11:29
  • 호수 108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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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 워크숍 열려
▲도집강 조영구와 도집강 임명장
▲도집강 조영구와 도집강 임명장

국사편찬위원회 충남·세종·대전지역 조사사료위원 워크숍이 지난 23일 문예의전당 소강당에서 열렸다.

국사편찬위원회가 주최하고 사료위원 충남·세종·대전지회가 주관한 이날 워크숍에서는 서천의 유승광 사료위원이 서천지역 동학농민전쟁 유적·유물에 대해 발표를 하고 박수환 사료위원이 토론자로 참여했다.

유승광 위원은 발표에서 서천지역에서는 언제 누구에 의해 포교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구전과 문헌에 의하면 1894년 동학농민전쟁 이전에 이미 포교가 이루어졌고 많은 사람들이 가담했다면서 이같은 사실은 조영구의 실적’, 최덕기의 동학난 일기를 통해 알 수 있다고 말했다.

1894(갑오년) 7월에 북접 법헌으로부터 도집강 임명장을 받은 조영구가 남긴 실적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정해년 (1887)에 당해 동학 교문에 입교해 7년 동안 포교함에 교도 3만여에 달하고 저산칠읍의 대접주의 영예를 얻게 되었다

유승광 위원은 당시에는 서천지역이 서천-한산-비인으로 나뉘어져 있었기 때문에 3명의 동학접주가 있었을 것이라며 서천의 추용성, 한산의 김약선만 전하고 비인은 최재홍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최재홍은 동학난에 가담한 후 쫓겨다니다 서면 월리 짚눌에 숨어있다가 체포되어 비인 서문거리 옥터에서 굴비처럼 엮여 화형을 당했다고 전한다.

한편 서천지역의 접주들은 납접의 영향이 강했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북접에 속해 활동했다고 밝혔다. 이는 조영구가 북접 법헌으로부터 도집강 임명장을 받았으며 최시형의 명에 의해 저산칠읍을 순회한 사실에서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이날 토론회에서 유승광 위원은 서천지역에서 동학농민군의 활동에 대해서도 상세히 설명했다. 1894년 홍주 목사 이승우의 지시로 관군의 일부가 서천지역으로 이동해 동학농민전쟁은 한산읍성, 화양산, 서천읍성을 점거하고 있던 동학군과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는 것이다.
한편 토론자로 나선 박수환 사료위원은 당시 한산지역은 남접의 입김이 강해 남접의 노선을 따랐고 서천과 비인지역은 북접의 노선을 따른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이어 이날 토론회에서는 세종시 박종관 사료조사위원의 교리 성담년의 생애와 행적보령시 황의호 사료조사위원의 ‘20세기 초 보령 구룡리 화망마을 황온가의 혼인용품 구입과 부의에 관한 연구등의 발표가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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