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어 술이편 7-1문장은 이렇게 시작된다.
“공자는 말한다.<자왈子曰> 전술하되 새로 짓지는 않으며<술이부작述而不作> 믿어서 옛것을 좋아하니<신이호고信而好古> 다른 사람 모르게 내심 나를 노팽과 비교해보노라.<절비어아노팽竊比於我老彭>”
전술에서 전傳이란 선현의 옛글을 말하며 술述은 선현의 말 곧 전傳을 천술闡述한 것으로 심오한 글을 조금 쉽게 논술했다는 말이다. 경학가 황간皇侃의 주에 따르면 전어구장傳於舊章이라 하여 전이란 옛 문장에 전해오는 것이라 했다. 공자가 이를 만나 쉽게 풀었다는 말이다.<공구우개孔丘遇開>
또한 주자朱子의 집주集註에 따르면 “술述은 옛것을 전할 뿐이다”이고 “작作은 처음 창작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작作은 성인聖人이 아니면 할 수 없는 것이요<작자지위성作者之謂聖> 술述은 현자賢者라면 가히 할 수 있는 일이다.<술자지위명述者之謂明>
또 박물지博物志 권6 문적고文籍考편에 성인이 지은 것을 일러 경이라 하고<성인제작왈경聖仁制作曰經> 현자가 기록한 것을 일러 전이라 한다<현자저술알전賢者著述曰傳> 주자는 노팽老彭을 대대례기大戴禮記 오제덕五帝德편의 예를 들어 상商나라 때 대부 팽조彭祖라 한다.<석상노팽昔商老彭>
공자는 논어 술이편 7-27문장에서 말한다. “대부분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도 글쓰는 자도 있겠지만<개유부지이작지자蓋有不知而作之者> 나는 그런 적이 없다<아무시야我無是也>”
공자의 공부라는 것은 논어 위정편 2-11문장에서 이렇게 밝히고 있다. “늘 옛것을 익혀 새로운 것을 미루어 알아낸다면<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 가히 스승이 될 수 있다.<가이위사의可以爲師矣>” 이 말은 스승의 자격 제일조건을 온고지신에 두었다는 말이다.
공자의 공부관은 법고창신法古創新의 복고復古다. 옛글인 선현의 학문을 존중하되 그 존중함의 무게가 나를 드러내기 위한 창작이 아닌 옛 선현의 글을 더 쉽게 알리기 위한 서술에 중심을 뒀다는 말이다. 이러한 기조 위에 써내려간 것이 곧 춘추라는 책이다.
일찍이 공자는 55세부터 68세까지 장장 14년간에 걸쳐 70개 나라를 돌아 13개 국가를 머물며 자신의 공부관?을 역설한 바 있다. 그 공부관 속에는 군주답게 행동하라. 전쟁을 하지 말라. 욕심을 부리지 말라. 백성을 사랑하라 예와 도덕을 지켜라. 그리고 다소 뜬금없을 것 같은 말, ‘시를 읽어라’가 포함되어 있다.
많은 군주들은 공자의 명성을 등에 업고자 공자를 초빙한다. 그러나 공자의 말을 듣기는 하나 실천하지는 않는다. 이에 생각을 달리한 공자는 14년간의 철환주유를 끝으로 고향 곡부로 돌아와 군주와 백성들 모두가 바르게 될 수 있는 불후의 명저 춘추라는 제하의 책을 쓰기 시작한다.
춘추는 노나라 은공원년隱公元年 기미己未 주평周平王왕49년(기원전紀元前722년) “춘<春>주왕의 정월이라 은공 주의보와 멸 땅에서 맹하다”로 시작해서 “노나라 애공십사년哀公十四年경인庚寅 주경왕周敬王39년(기원전 紀元前481년) 춘<春> 노나라 서쪽 대야에서 기린이 잡히다”라는 문장으로 끝을 낸 노나라 역대 12명의 군주의 기록으로 242년간의 통치역사를 정리한 책이다. 춘추책은 먹물이 남아서 더 씀도 아니요. 먹물이 모자라서 덜씀도 아니다. 춘추라는 책은 술이부작述而不作으로 비롯되는 공자의 글쓰기 완역이다.
공자는 춘추책을 상재하고는 너무 뿌듯하여 이렇게 술회한 바 있다고 맹자는 등문공하편에서 밝히고 있다. “나를 아는 것은 오직 춘추요<지아자기유춘추호知我者其惟春秋乎 나를 죄줄 것도 오직 춘추다.<죄아자기유춘추호罪我者其惟春秋乎>”
좌구명은 춘추좌씨전 성공14년조에서 춘추를 이렇게 밝히고 있다. “춘추의 가르침은<춘추지칭春秋之稱> 작은 듯하나 서서히 드러나며<미이현微而顯> 뜻은 깊이 감추되<지이회志而晦> 완곡하면서도 문장은 완벽하며<완이성장婉而成章> 곡진하면서도 오염되지 않았나니<진이불오盡而不汚> 악을 징계하고 선을 권하니<징악이권선懲惡而勸善> 성인이 아니고서야 누가 능히 이를 수사<修史:역사를 꿰뚫어 문장으로 엮다>할 수 있겠는가.<비성인수능수지非聖人誰能修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