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 ‘장르’가 된 정태춘의 뜨거운 귀환
​​​​​​​스스로 ‘장르’가 된 정태춘의 뜨거운 귀환
  • 허정균 기자
  • 승인 2022.05.24 14:57
  • 호수 110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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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이야기]기벌포영화관, ‘아치의 노래’ 상영
영화 속의 정태춘
영화 속의 정태춘

정태춘의 가수 활동 40년을 담은 기록영화 아치의 노래가 기벌포영화관을 비롯 전국 개봉관에서 5월을 뜨겁게 달구고 있다. 그에게는 수식어가 많이 따라다닌다. ‘우리시대의 음유시인’, ‘스스로 장르가 된 뮤지션’, ‘시대의 아픔을 함께 한 민중가수...

그는 1978 6월 제대 후 안면이 있었던 경음악 평론가 최경식의 주선으로 서라벌 레코드사와 인연을 맺고, 그동안 차곡차곡 모아두었던 자작곡으로 데뷔음반을 냈다. 이 음반이 크게 인기를 얻으며 1979 MBC 신인가수상과 TBC 방송가요대상 작사부문상을 수상했다. 그는 음반을 준비하던 중 신인가수 박은옥과 만나 1980년 결혼했는데 평생 동지이자 함께 많은 노래를 만들고 불렀다.

1978년 데뷔곡 시인의 마을이 한국공연윤리위원회 심의 끝에 상당 부분 개작되어 데뷔 음반에 수록된 것을 계기로 그는 대한민국의 가요 사전심의 제도에 대한 반대 운동을 시작했다. 1990, 대한민국’, 1993‘92년 장마, 종로에서등 비합법 음반을 내면서 사전심의 폐지운동을 전개하여 1996년 헌법재판소의 가요 사전심의 위헌 결정이라는 성과를 얻어냈다.

시류가 변해가면서 그는 언더그라운드 가수로 자리를 잡았다. 그는 민중 속으로 파고 들었다. 청계피복노조 노동자들과 함께 했으며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이 탄압을 받을 때에는 송아지 송아지 누렁송아지를 작곡해 이 노래와 함께 전국을 순회하며 큰 동력을 불러일으키도 했다.

극중에서 정태춘은 말한다. “‘떠나가는 배를 부를 때만 해도 참 좋은 세상에 대한 갈망이 있었습니다. 지금 사는 세상이 좋은 세상이 못되고 그래서 늘 떠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다시 우리가 살고 있는 삶의 터전, 우리 형제들이 살고 있는 땅, 우리가 만들어놓은 역사라는 현실로 돌아와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을 바꾸고자 한 것이었습니다.”

그의 동지 박은옥은 말한다. “우리가 이런다고 세상이 바뀔 리는 없지만 그런 고통받는 사람들과 아픔을 함께하고 우리가 능력 닿는 대로 실천하는 데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의 고향은 경기도 평택시 팽성읍 도두리이다. 2006년 참여정부 때 이곳에 미군기지가 들어서며 280여만평의 들판이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 정태춘은 그의 정서가 배어있는 고향으로 가서 주민들과 함께 싸웠다.

우리 팔 걷어 붙였네
우리 팔 걷어 붙였네
대추리 도두리 황새울 지킴이
우리 팔 걷어 붙였네

우리 평택으로 가네
우리 평택으로 가네
대추리 도두리 황새울 지킴이
우리 평택으로 가네

정태춘은 제 나라 백성을 상대로 다른 나라를 위해 전쟁을 벌이는 미친 정부의 모습을 보았다. 이후 그는 노래 만들기를 그만두었다 한다.

2019년 오월을 맞아 광주에서 그의 음악활동 40주년을 기념하는 공연이 열렸다. 이후 전국 순회공연에 나섰으며 영화는 그의 공연 모습을 마지막 장면으로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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