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모시장터 / 흔적
■ 모시장터 / 흔적
  • 최용혁 칼럼위원
  • 승인 2022.07.15 0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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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용혁 칼럼위원
최용혁 칼럼위원

아카시아 향기가 코끝에서 훅 하고 들어 와 머릿속에 가득 차는 순간, 어떤 날의 햇살과 바람, 누군가와 함께 걸었던 긴 담장과 어쩔 줄 몰라 했던 손끝이 여지없이 떠오른다. 모심을 무렵, 하루가 온통 작업 계획으로 가득 차 있는데도 불구하고 아카시아 향기는 어떤 기억의 흔적을 건드려 과거와 접속한다. 함께 걸었던 사람이 남자인지 여자인지, 긴 생머리였는지 단발머리였는지, 또는 아련한 긴 담장은 한성 고궁의 담벼락이었는지 대전의 어느 골목길이었는지, 손끝은 왜 어쩔 줄 모르고 떨리는 느낌으로 남았는지 어느 것도 분명하지는 않지만, 아카시아 향기만은 진실이었던 것 같다. 어쩌면 자주 꾸는 꿈이거나 상상일 수도 있다. 확실한 것은 2022년의 아카시아 향기가 20세기말의 흔적을 불러내어 머릿속이 모내기로 가득 찬 2022년 가난하고 볼품없는 중년의 농민을 찬란한 햇살과 길게 이어진 담장 곁으로 안내했다는 것이다. 내 의지는 아니다. 바빠 죽겠는데 이런 기억이 아른거리는 것은 먹고 산다는 자본주의적 기준으로 봤을 때 당장은 확실히 불리한 현상이다.

나는 왜 거기 있었을까? 구체적 사건은 잊혀진다. 기억은 어떤 흔적과 흔적을 불러오는 새로운 조건으로만 구성된다. 뇌를 연구하는 어느 학자에 따르면 인간이 평생 겪는 모든 일들을 오롯이 기억하기 위해서는 1톤 이상의 무게를 가진 뇌를 모시고 살아야 한다고 한다. 다른 포유류에 비해 월등한 기능을 가졌지만, 1톤이나 되는 뇌를 어깨 위에 올리고 살 수는 없으니 중요하지 않은 것부터 날려 버리는 것이다. 구체적 사건에 대한 오래된 기억은 버리되 흔적은 남긴다. 이것은 자연의 법칙이기도 하다. 흔적으로 남긴 정보는 오랫동안 전승된다. 돌에 남은 흔적을 통해 2억 년 전 쥐라기 시대 공룡의 생로병사를 짐작하기도 한다. 어떤 암석은 40억 년 된 지구의 일대기를 복원하는 정보를 주기도 하고, 뜻밖에 지구 밖 다른 행성과의 관계를 발견하기도 한다. 나무는 몇 천 년의 기후를 제 몸에 남긴다. 매년 피고 지는 무성한 꽃잎 하나하나도 그 시절에는 더 없이 소중한 일이었겠지만, 꾹꾹 눌러 담긴 나이테의 흔적 앞에서는 참으로 덧없는 것이기도 하다.

구체적 사건은 사라진다는 가벼움보다 흔적은 남는다는 무거움이 앞선다. 삼시 세끼 밥 챙겨 먹고 하루 종일 사고치고 다니는 인간의 모든 활동도 결국 구체적 사건으로 보존되는 것이 아니라 흔적으로 남는다. 몇몇에게만 회자될 구체적 사건이 아니라 지구상에 영원히 새겨지는 흔적으로 남는 방식으로써 진실에 가까워진다. 그렇게 결국, 내 만행은 공룡도 알고 나무도 알고 심지어 돌도 알게 될 것이다.

관찰한 일, 기억한 일, 애써 한 일들이 잊혀지고 사라진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몇 천만년이 지나더라도 새로운 발화 조건에서는 반드시 소환된다. 잊혀지는 사건이 아니라 남겨지는 흔적이 오래도록 진실을 말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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