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일환의 낱말 여행(9) / 육병풍(肉屛風)
■ 박일환의 낱말 여행(9) / 육병풍(肉屛風)
  • 박일환 시인
  • 승인 2022.08.01 08:04
  • 호수 111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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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전에서 도려내고 싶은 낱말
▲박일환 시인
▲박일환 시인

아름다운 말과 그렇지 못한 말이 있다. 아름답지 못한 말의 예로 비어나 속어 같은 걸 들 수도 있지만 그런 말이 아닌데도 불쾌감을 주는 말을 만날 때가 있다. 낱말 자체야 아무런 죄가 없다지만 그런 말을 만들게 한 사람에 대해서는 화가 난다. 국어사전에 나오는 아래 낱말을 보면서 불쾌감을 느낄 사람이 나만은 아닐 것이라 믿는다.

육병풍(肉屛風): 여자를 줄 세워서 병풍의 대용으로 한 것을 이르는 말. 중국 당나라의 양국충(楊國忠)이 겨울에 자신의 비첩 가운데 뚱뚱한 자를 골라서 줄 세우고 찬 바람을 막은 데에서 유래한다.=육진(肉陣), 육장(肉障).

양국충은 대체 어떤 사람이었을까? 대단한 권력가였을 거라는 점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권력가 중에도 훌륭한 인품을 지닌 이들이 꽤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못한 자들이 더 많다는 건 역사책을 조금만 들춰봐도 알 수 있다. 그러다 보니 권력이라는 낱말에는 대체로 부정적인 뉘앙스가 따라붙곤 한다. 육병풍이라는 말이 생기도록 만든 양국충은 못된 권력가들 중에서도 상급에 속하는 인물임이 분명하다. 그런 인물 이름이 <우리말샘>에 표제어로 올라 있다.

양국충(楊國忠): <인명> 중국 당나라 현종(玄宗) 때의 재상(?~756). 양귀비의 친척으로 등용되었으나, 뇌물로 조정을 문란하게 하였으며, 전횡을 일삼았다. 안녹산과의 반목으로 안사의 난을 자초하였다.

현종이 양귀비에 빠져 정사를 팽개치는 바람에 나라에 극심한 혼란을 불러왔다는 건 다들 아는 얘기다. 초반기에는 선정(善政)을 펼쳐 자신의 연호를 딴 개원의 치(開元-)’라는 말이 나오게 할 정도로 뛰어난 군주였으나 후반기 인생이 모든 걸 망쳐버리고 말았다. 현종 스스로 불러들인 일이니 누굴 탓할 수도 없는 일이고, 더구나 양귀비의 친척이라는 이유만으로 등용해서 직접 국충國忠)’이라는 이름까지 지어주며 국정을 맡긴 건 최대 실책이었다.

양국충에게 자신이 거느리던 여자들은 어떤 존재였을까? 동등한 인격을 가진 존재라는 인식 자체가 없었음은 물론이고, 기껏해야 말을 할 줄 아는 동물 정도로나 여기지 않았을까?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여성을 병풍 대용으로 삼는다는 발상을 할 수 있겠는가. 현종이 양귀비를 일러 말을 할 줄 아는 꽃이라는 뜻을 담아 해어화(解語花)라 한 것도 그런 인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왕인유(王仁裕)가 현종 시대의 각종 일화를 모아서 엮은 개원천보유사(開元天寶遺事)라는 책이 있다. 이 책에는 양국충 못지않은 인물 두 명이 더 나온다. 현종의 동생인 신왕(申王)은 양국충과 마찬가지로 추운 겨울에 기생들을 자신의 둘레에 세워 추위를 막았으며, 이를 기위(妓圍)라고 했다. 현종의 또 다른 동생 기왕(岐王)은 손이 시리면 시중을 드는 어린 처녀의 가슴에 손을 넣어 찬기를 가시게 했으며, 이를 난수(暖手)라고 했다. 다행히 기위(妓圍)와 난수(暖手)라는 말은 국어사전에 올리지 않았다. 국어사전에서 육병풍이라는 말을 볼 때마다 그 부분만 칼로 도려내고 싶은 마음이 들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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