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획취재 / (옛)장항제련소의 어제와 오늘 (1)장암리의 역사
■ 기획취재 / (옛)장항제련소의 어제와 오늘 (1)장암리의 역사
  • 뉴스서천
  • 승인 2022.09.08 12:15
  • 호수 111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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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하구 기벌포, 백제 수도 사비성의 관문

백제 멸망으로 이어진 백강전투의 현장

고려말 왜구 물리친 진포구 대첩 이곳에서

이 기획취재는 충남미디어발전위원회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중금속 오염 피해를 남기고 2008년에 철폐된 장항제련소가 있었던 장항읍 장암리 일원은 서천에서 인류가 신석기시대에 정착해 내륙을 향해 문명을 쌓아가던 곳이었다. 금강하구를 지키던 이곳은 백제시대에는 기벌포로 불리며 사비성의 관문 역할을 했던 곳이며 이곳에서 나당연합군과 백제-왜 연합군의 국제해전이 있었다. 고려시대에는 최무선이 함포를 이용 왜구를 물리친 진포구 대첩의 현장이었다. 일제는 이러한 곳에 제련소를 짓고 조선의 금을 수탈해 전쟁놀음을 벌였다. 장항제련소를 둘러싼 장암리 일원의 과거와 오늘을 살펴보고 현재 진행되고 있는 오염정화토지 재활용 사업에 도움을 주기위해 뉴스서천이 충남미디어발전위원회의 지원을 받아 이번 기획 취재를 마련했다. 장항제련소의 과거 모습, 인근지역 주민들의 삶, 중금속 오염 피해, 오염토지 정화사업, 타지역 사례(영풍제련소 인근 주민들, 경남 고성군 폐구리광산 인근지역) 등을 취재해 6회에 걸쳐 연재할 계획이다.<편집자>

장암리 출토 빗살무늬토기

▲1995년 장암리에서 출토된 빗살무늬토기. 국립부여박물관
▲1995년 장암리에서 출토된 빗살무늬토기. 국립부여박물관

인류가 숲에서 나와 농사를 지으며 정착생활을 시작한 곳은 바로 강 하구나 바닷가였다. 식량을 쉽게 구할 수 있고 별도의 염분을 섭취해야 하는 데 따르는 소금을 쉽게 얻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육식 위주의 수렵생활은 동물의 체내에 함유된 염분이 있어 별도의 소금을 섭취할 필요가 없었지만 곡식을 위주로 식생활을 시작하면서부터 사람들은 별도로 소금을 섭취해야 했던 것이다.

따라서 인류가 가장 먼저 문명을 싹틔운 곳은 한반도 전역을 포함한 요하 하류지역이었다. 이는 나일강이나 유프라테스강, 인더스강, 황하에서 싹튼 문명보다 2000~3000년이 더 앞선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지금도 중국 요녕성에서 발굴작업이 계속되고 있다.

여기에서 출토된 빗살무늬토기와 같은 토기가 금강 하구에서도 출토됐다. 1997년 장항읍 장암리 당크뫼에서 출토된 빗살무늬토기 두 점은 현재 부여박물관에 있다. 이러한 빗살무늬토기는 후대의 비파형동검과 함께 요하문명권에서만 출토되는 유물이다.

이처럼 갯벌은 인류가 정착생활을 처음 시작한 곳이었고 이 갯벌을 발판으로 인류는 내륙을 향해 문명을 확장해갔다.

동아시아 역사 바꾼 기벌포 해전

▲676년 당의 세력을 축출한 기벌포대첩
▲676년 당의 세력을 축출한 기벌포대첩

서해를 지중해 삼아 중국 월주에서 왜에 이르는 해상왕국을 건설했던 백제에 있어서 금강 하구에 자리잡은 서천은 수도인 사비성의 관문이었다.

660년 이곳을 통해 나당연합군이 상륙하였다. 서천에는 천방산과 남산성을 비롯해 나당연합군의 상륙과 관련된 많은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 또한 백제가 일본의 지원을 얻어 나당연합군과 벌인 663년 백강전투의 현장은 바로 금강하구였다.

이 싸움에서 제왜연합군이 패해 마지막 왕성이었던 주류성이 함락되고 백제의 사직은 끊어졌으며 동아시아의 정세는 크게 바뀌었다. 백제 멸망 이후 676년 신라가 대동강 이남에서 당의 세력을 완전히 축출한 기벌포 해전도 금강하구인 서천에서 벌어졌다.

백강전투에서 제왜연합군의 패배는 이후 고구려의 멸망으로 이어졌고 동아시아의 정세는 크게 바뀌었다. 이처럼 금강하구는 동아시아 역사의 중심지였다.

진포구대첩의 현장 장항

▲ 대동여지도에 나타난 금강하구. ‘진강’이란 이름이 장항읍 쪽에 표기되어 있다.
▲ 대동여지도에 나타난 금강하구. ‘진강’이란 이름이 장항읍 쪽에 표기되어 있다.

<고려사> 우왕6(1380) 7월조에 왜구들이 서주(西州)에 침구하였다. 또 부여, 정산, 운제, 고산, 유성 등의 현에 침구한 뒤 마침내 계룡산에 들어갔다. 부녀자들과 어린아이들이 왜구들을 피하여 산으로 올라갔는데 그 중 많은 사람들이 살해되거나 붙잡혔다.”라는 기사가 있다.

이때 나세 장군과 그의 부관 최무선은 화포로 왜구들을 섬멸시켰다. 이러한 승전의 역사를 진포구대첩이라 부르며 세계 역사상 최초로 함포사격을 한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이 전투의 현장인 진포가 서천이냐 군산이냐에 대해 논란이 많다.

한국방송통신대학교 일본학과 이영 교수는 200711월 서천에서 열린 진포구대첩 학술대회에서 진포구는 장항읍 일대임을 밝혔다.

1530년에 완성된 <신증동국여지승람> 서천군 조에 진포에 대해 진포(鎭浦)는 서천군의 남쪽 26리에 있으며 임천의 고다진에서 서천포에 이르는 포구들을 통틀어 진포라 하고 그 사이의 여러 진과 포는 모두 진포의 도섭처(渡涉處)이다라고 하고 있다. 또한 군산시에 있었던 군산진은 진포구 전투가 있었던 경신년(1380)에는 존재하지도 않았다.

<성종실록>서천진은 바다 어귀에 있고 그 포의 상류에 군산진이 있는데 만약 수적이 변경을 침범하면 반드시 서천을 경유해야만 군산에 도달하니 청컨대 군산의 군사를 서천에 더하고 군산을 혁파함이 어떠하겠습니까?”라는 기사를 보아도 군산진 일대가 진포구 전투의 현장이라고 볼 수 없다.

당시 왜구는 500여척의 선단을 이끌고 쳐들어와 선박을 밧줄로 묶어 정박하고 있었다. 여기에 고려 수군 100여척이 공격을 가해 전투가 벌어졌던 곳이 진포구이다. 왜구 선단은 바닥이 평평한 평저선이 아니라 대양항해가 가능하도록 만들어진 첨저형이다. 이러한 선박들이 정박하려면 충분한 수심이 확보되어야 한다. 이러한 조건을 갖춘 곳은 군산쪽에는 없다. 그러나 서천에는 아포와 용당진, 서천포영이 있었다.

▲ 조선 영조 때 발간된 해동지도에 그려진 장암리 모습.
▲ 조선 영조 때 발간된 해동지도에 그려진 장암리 모습.

조선총독부가 1911년에 제작한 지도에서 오늘의 장항읍 일대를 보면 전망산과 후망산 사이의 만입된 지형과 장암리와 용당진 사이의 크게 만입된 지형이 잘 나타나 있다. 1937년에 출간한 <성장하는 장항>이라는 책에는 장항항의 모습을 항만은 수심이 6~10m3천톤에서 4천톤급 선박이 정박하기에 충분하고 특히 매년 강바닥을 씻어내려 깊어져가는 경향이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로 보면 왜구의 500여척 선단이 정박하기에 충분한 조건을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전망산과 후망산은 서해안을 따라 오르내리는 선박과 금강을 왕래하는 모든 선박을 한눈에 살펴볼 수 있으며 이곳이 바로 660년 당나라 군사가 상륙한 기벌포이며 고려 때 쌓은 장암진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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