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획취재/서천군청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1)현청사 톺아보기
■ 기획취재/서천군청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1)현청사 톺아보기
  • 고종만 기자
  • 승인 2022.09.29 10:07
  • 호수 111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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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보존된 서천읍성 놀랍다…사적으로 승격해야”.

일본식 청사 헐고 1966년 현대식 건물로 개축
서천읍성 동문 쪽에서 바라본 서천읍성 원경
▲서천읍성 동문에서 바라본 서천읍성 원경

서천군 청사가 585년만인 내년 5월 옛 서천역사 인근 화금리 들판으로 이전한다. 뉴스서천은 서천신문과 함께 내년 3월 신청사 이전을 앞두고 서천군이 추진하는 서천읍 농촌 중심지 활성화 사업의 일환으로 첫 번째 현 청사 톺아보기를 시작으로 현 청사를 기억하는 사람들의 이야기’, ‘청사 이전 후, 현 청사 어떻게 변할까?’란 주제로 3회 연재한다.<편집자>

여론조사에 따른 청사 이전 위치

민선 서천군수들의 단골 공약으로 청사 이전을 내세웠지만 헛 공약으로 그쳤다. 표를 의식한 민선 군수가 서천군 청사를 중심으로 형성된 기득권을 쥔 상권 붕괴로 인한 공동화 현상이 초래될 경우 차기 선거에서 당선을 보장받기 어렵다는 계산에서이다.

청사 이전은 노박래 군수 시절 전격 결정됐다. 노박래 군수가 청사 이전을 결정하기 앞서 뉴스서천은 2016628일 여론조사기관 윈폴에 의뢰해 서천지역 19세 이상 성인남녀 726명을 대상으로 신청사 이전부지에 대한 여론조사를 실시했다. 조사 결과 군이 신청사 부지로 결정한 옛 서천역 청사 인근이 적당하는 응답이 과반을 넘는 54.5%로 조사된 바 있다.

뉴스서천 보도 이후 노박래 군수는 2016125일 문예의전당 대강당에서 열린 신청사건립 공청회에서 인사말을 통해 공약사항이기도 한 현 청사 이전을 더 이상 미루면 군수로서의 자격이 없다고 생각한다주민의견을 수렴해 신청사 건립 후보지를 결정하겠다고 밝혔다. 이어 군은 같은 해 1215일 서천군 청사추진위원회(위원장 당시 백낙흥 부군수)는 상황실에서 신청사 건립 최종후보지 선정을 위한 평가단 평가회를 열어 옛 서천역사 인근을 신청사 건립 최종후보지로 결정했다. 당시 옛 서천역사 인근은 총점 4000점 만점에 2883.38점을 받았다. 현 청사보 444.57점 높았다.이로써 서천군청은 620년만인 내년 3월 옛 서천역사 부근 신청사로 이전하게 됐다.

서천군 치소의 변천

그렇다면 과거 서천군은 어떤 변천과정을 거쳐 서천읍성 부지인 현청사로 이전했는지를 과거 문헌과 향토사학자의 증언과 자료로 살펴본다.

서천군의 과거 역사는 박수환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이 최근 발표한 서천군 관아官衙가 걸어온 역사歷史-서천, 치소治所를 중심으로를 인용해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서천군은 기원전 300년 마한시대부터 존재했다. 당시 서천지역은 마한지역 54개국 중 3개의 소국으로 통치됐다. 서천, 장항, 마서, 시초, 문산지역은 아림국兒林國(서천지역), 화양, 기산, 한산, 마산은 치리국국致利鞠國(한산지역), 판교, 종천, 비인, 서면지역은 비미국卑彌國(비인지역) 3개 소국에 편제됐다. 이후 서천지역 3국은 삼국시대에는 강력한 국가형태 부족으로 흡수됐다.

서천군의 명칭도 시대를 달리해 불리웠다백제시대에는 서천군의 명칭이 설림군舌林郡 또는 남양南陽(현 시초면 풍정리와 문산면 신농리 일대 들판 지칭)으로 불리웠으며 치소는 현 음적사 입구에 위치해 있다. 조선시대에는 신농리가 두산면 두산면豆山面 왕야리旺也里에 속했다.

통일신라시대에는 군의 명칭이 서림군西林郡으로 바뀌었으며 치소는 신라 경덕왕 16(757)두산산면 왕야리에서 문산면 문장리 화리禾里로 옮겼다.

고려시대부터 조선초 세종조 때까지 서천군의 명칭은 서림군西林郡 또는 서주西州로 불리웠으며 치소는 지금의 남산성(영취산)과 봉남리 산성으로 옮겨졌다.

세종 이후 현재까지 군의 명칭은 서주西州와 서천군舒川郡으로 변경됐으며 치소 위치는 서천읍 군사리 오석산烏石山 자락에 위치해 있다. 서주에서 서천군으로 개명된 것은 조선 태종 13년인 14131015일이다.

봉남리산성에서 조선초 서천읍성으로 이전

그렇다면 서천군의 치소(지금의 군청)가 서천읍성으로 옮긴 것은 언제일까?

충남도 문화재자료로 지정된 평지형 서천읍성의 축조 연대는 지금부터 584년 전인 조선 초 세종연간(1438~1450)에 축조됐다.

남산 및 봉남리 산성에 있는 치소(관아)가 서천읍성으로 옮겨진 것은 세종 때 이종무의 대마도 정벌과 무관치 않다.

향토사학자 박수환 전 한산면장은 전쟁시에는 치소(관아)를 산성으로 옮겨 전쟁에 대비한다면서 세종조 때 남산성에 이어 봉남리 산성에 있는 치소를 지금의 서천읍성으로 옮긴 것은 1419년 이종무가 대마도 정벌을 통해 왜구를 무찌른 것과 무관치 않다고 말했다.

이어 이종무가 대마도를 정벌로 금강하구에 출몰하던 왜구가 사라지면서 왜구를 감시했던 산성 대신 평지인 서천읍성을 축조하고 치소를 옮기게 됐다는 것이 박수환 전 한산면장의 설명이다.

서천읍성은 남산성의 단점을 보완한 조선시대 성을 대표하는 읍성으로 꼽히고 있다.

역사학자 유승광 박사와 서천읍성 발굴 작업에 참여하고 있는 충남역사문화연구원에 따르면 서천읍성 발굴 조사 결과 성 외부로부터 해자와 목익(땅에 박아놓은 목창), 방어시설(함정 및 목책 추정), 성벽, 치성으로 구성된 3단계의 온전한 방어시스템을 확인할 수 있다.

실제 발굴조사에서 해자 등 방어시설이 실체를 드러냈다. 성벽으로부터 적의 접근을 막는 해자는 성벽의 앞쪽에서 11미터 거리를 두고 암반을 굴착해 U자형으로 만들어졌고 내부에는 석축시설을 조성했다. 평지형인 서천읍성의 경우 해자는 물을 채워 적의 침투를 막는 방호시설로 해자의 너비는 7~8미터였으며, 적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한 목창 등 목익시설이 다수 발견됐다.

성벽에는 사각 모양으로 돌출된 치성(치라고 불리기도 함)은 성벽과 함께 입체적인 방어선을 구성하는 시설로, 전면 9.7미터, 측면 8.3미터이며 성벽의 높이는 3미터 이상으로 보존상태가 양호하다. 현재 서천읍성에는 모두 16개의 치성이 설치돼 있다.

역사학자 유승광 박사는 서천읍성 동문의 문이 성곽보다 안쪽에 설치돼 있어 침입하는 적들을 정면과 양측면에서 공격할 수 있는 치가 잘 보존돼 있다고 말했다.

발굴조사를 담당한 박병희 충청남도 역사문화연구원장은 20201130일 서천읍성 남측 성벽 구간에 대한 2020년도 발굴조사 최종보고회 및 학술자문회의에서 서천읍성의 발굴조사를 진행할수록 잘 보존된 읍성의 모습에 놀라게 된다면서 이번 발굴조사 성과를 통해 정비 및 복원과 함께 현재 충남도 문화재자료 제132호인 서천읍성을 사적으로 승격되는 초석이 되길 바란다고 밝힌 바 있다.

임진왜란 때 소실된 관아, 동학군이 점령하기도

한편 서천군 관아는 왜군과 동학혁명에 의해 일부 소실됐고, 동학혁명 당시에는 관아에 보관돼 있는 무기가 동학농민군의 손으로 넘어가기도 했다.

향토사학자 박수환 전 한산면장에 따르면 우선 1592년 임진왜란과 1597년 정유재란을 거치는 동안 서천군청의 관아와 향교는 왜군의 침입으로 관아건물과 향교건물이 소실되는 피해를 입었다. 소실된 군청 관아와 서천향교는 임진왜란이 끝나고 복구됐다.

계속해서 서천군청 관아는 1894년 전봉준이 이끄는 전북 고부의 동학주력 농민군이 금강을 건너 한산 신성리 신성포를 거쳐 지역 내 동학농민군을 규합해 1112일 한산군 읍성을 점령, 관아에 불을 지른 뒤 같은 해 1120일 서천읍성을 점령하고 관아에 불을 질러 관아시설이 소실됐다. 이후 동학군은 조정의 진압군과 일본군의 지원으로 진압됐으며 다시 관청이 복구됐다

동학농민군에 의해 서천군청의 마필과 무기가 탈취당한 내용은 충청도관찰사 재임기간 동학란 사건보고일지인 금번집략錦蕃集略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에 따르면 서천군수 김인수 金麟洙18947월초7일 오시 무렵에 정체를 알 수 없는 무리 57명이 총과 창을 지니고 한산을 거쳐 서천군청에 도착했다. 이들은 부안 출신의 동학인들로, 전라도 연해에 일본 배가 수백 척 정박하면서 도 전체가 위급하고 황망하여 경계하는 데 필요한 마필과 무기가 모자란다면서 서천군청이 보유 중이던 총 1000자루와 말 100, 화약과 철환을 요구했다고 보고했다. 이어 김인수는 부안 동학인들은 자신들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수성포수대장守城砲水隊長을 잡아 죽인다고 협박해 재물을 수시로 빼앗고 수성포수가 지난 총 6자루, 화약 3, 철환 100, 2자루, 당나귀 2, 1필 등을 빼앗아 신시 무렵 나갔다고 보고했다.

같은 해 117일 서천군수로 부임한 유기남柳冀南17일 서천군청 동학란 피해보고에서 서천읍이 호남에 인접해 있어 때때로 (동학인들이) 강을 건너 노략질하자 백성들이 도망가려는 것을 설득해서 3000여명을 모이게 했다. 하지만 무기는 전에 하나도 남김없이 잃어버려 (비류)와 싸워 막아낼 방법이 없고, 3000명의 백성들에게 먹일 식사 비용이 부족하다면서 공납公納에서 충당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서천군수 유기남은 다른 읍이 동도의 손으로 들어간 잃어버린 군기를 찾고자 했지만 매우 급한 상황이라 찾지 못했고, 호남으로 도망간 (동학농민) 괴수는 기찰하고 정탐해 징치할 것을 도모하고 있고 이후 상황은 계속 보고하겠다고 밝혔다.

유기남의 보고에 대한 제에서 군수가 자리를 비운 때에 민심이 소요를 만났으니 어찌 일이 매우 번거롭고 바쁘지 않겠는가? 대중의 마음이 성을 이루니 오직 구율함이 어떠한가에 달려 있다. 그리고 날마다 소비되는 식량으로 말하자면 장차 어떠한 것이든지 옮겨다 사용한 뒤에 순영과 본 진영 양쪽에 보고하도록 하라고 명령했다.

동학농민군 침입사건 보고 1
김인수 군수의 동학농민군 침입사건 보고 1
동학농민군 침입사건 보고2
김인수 군수의 동학농민군 침입사건 보고2
유기남 군수의 동학군농민군 피해보고 1
유기남 군수의 동학군농민군 피해보고 1
유기남 군수의 동학농민군 피해보고 2
유기남 군수의 동학농민군 피해보고 2

 

일본식 건물에서 현청사로 개축 56년째 사용

마한시대 소3처럼 서천군, 비인군, 한산군 3군이 서천군으로 통·폐합된 것은 일제강점기인 191441일자이다. 유승광 박사는 비인군과 한산군이 서천군으로 통폐합되면서 비인군과 한산군의 기득권 세력이 몰락하는 계기가 됐다면서 대신 군수와 과거에 합격한 소수의 사람들, 그리고 아전들이 신흥 주류로 등장했다. 이들은 과거 군에서 면으로 격하되면서 과거 군 소유의 땅을 취득하면서 부를 챙겼다고 말했다.

서천군 청사는 일제강점기 일본식 청사에서 해방 후 현재의 청사로 개축돼 올해로 56년째 사용해오고 있다.

박수환 향토사학자에 따르면 서천군청사가 일본식 목조기와로 지어진 것은 대정 10년인 1921년이다. 일본은 1910년 한일강제 합병 이후 조선시대에 남아 있던 관청 6(1548)을 철가한 뒤 조선총독군수 권익채權益采 군수가 군비를 들여 현재의 군 청사 부지에 목조기와로 71평을 신축했다. 이어 소화 6년인 1931년에 89평 규모의 군청회의실이 증축됐다. 해방이 된후 서천군은 일본식으로 지어진 군청사를 사용해오다다 홍순국(洪淳國)군수(1974326일부터 1966531일까지 재임)이 콘크리트로 2층 슬라브로 개축했고, 1966830일 지금의 본관동이 준공됐다. 이후 후관동 1, 후관동 2층 순으로 신·증축되어 사용되고 있다.

실제 군수 관사로 사용되던 곳은 기획감사실 예산팀과 전국공무원노조 서천군지부 사무실로 사용되고 있다. 2012716일부터는 군청사회복지과(현 사회복지실)가 옛 한국농촌공사 건물로 이전해서 업무를 보고 있다. 군은 또 2019년 행정기구 개편에 따라 분과된 관광축제과와 문화체육과를 20192월부터 옛 미래산부인과 건물인 군청로 32로 옮겨 업무를 보고 있다.

이밖에도 2009916일부터 옛 서천역사에서 업무를 보던 맑은물사업소와 서천발전전략사업단(한시기구로 나중에 공공시설사업소로 흡수 통합)201774일 옛 장항버스터미널로 이전해 업무를 보고 있다.

행정사무 증가하며 신·증축 잇달아

해방이후 1966년 본관동 준공 전까지 사용했던 일본식 군청사는 19603.15부정선거 당시 투표 결과를 조작하기 위해 1층 마루바닥을 뜯어 불을 지르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향토사학자 박수환 전 한산면장은 청사 본관동을 비롯한 부속건물이 시기를 달리해 신증축돼 건물마다 창문 아치 등이 다르다는 것 외에 건축사적으로는 의미가 없다면서 다만 청사가 신증축된 것은 행정수요가 증가하면서 부서 신설과 공무원 증원에 따른 비좁은 사무공간 확대에서 비롯됐다고 말했다.

박수환 전 한산면장에 현재 서천군청사의 공간별 구조 변화에 대해 물었다. 그에 따르면 본관동 우측컨테이너에 있던 구내식당은 현 후관동 뒤로, 민선 박형순 군수때부터 사용했던 군수 관사는 현재 기획감사실 예산팀이 사용하고 있다. 후관동 뒤편 교육지원청 관사로 쓰였던 건물은 직원들의 탁구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민원실과 도시건축과와 건설과 등이 사용하고 있는 별관동 뒤편에 조성된 주차장 초입에는 민선 박형순 군수 취임 전까지 있었던 군수 관사가 있었으며, 테니스장으로 사용됐다. 본관 앞 은행나무가 서 있는 곳에는 비석 받침인 2개의 귀부龜趺가 있다.

유승광 박사에 따르면 두 개의 귀부 중 하나는 현 비둘기 예식장 옆 주차장 조성 과정에서 땅에 묻혀 있던 것이 발견돼 현 청사 앞으로 옮겨놨고 나머지 하나는 부여박물관으로 옮겨졌다. 현재 군청 본관 앞에 있는 귀부 2개와 서천여중고 교훈탑(진선미)을 받치고 있는 귀부는 군청 본관 앞에서 발견됐다. 이중 귀부의 머리가 좌우를 바라보고 있는 귀부 2개는 군청 본관 앞에. 정면을 바라보고 있는 귀부는 서천여중고로 옮겨졌다.

성안마을에 서던 오일장 봄의마을 장소로

이밖에도 군청 정문에서 오른쪽에는 비석군이 있다. 비석 중에는 농사짓는 데 절대적으로 중요한 물 관리를 잘 한 구봉서 군수가 있는가 하면 서천군수를 지낸 뒤 동부승지 황연도 관찰사로 자리를 옮긴 이명(조선왕조실록에 악명 높은 군수로 서천에서 하던 짓을 그대로 하다니”), 간도 땅이 조선 땅이라고 주장한 암행어사 이중하 감계사(경계를 정하는 벼슬)의 영세불망비가 세워져 있다.

성안 마을은 서천읍성 내에 있는 마을이라 해서 붙여진 마을이다. 군청 민원인 주차장에서 서천여중고 아래에 형성된 성안마을에는 지금의 전통 5일장이 형성돼 있었다. 박수환 향토사학자에 따르면 성안마을에 들어섰던 시장은 1928년까지 운영됐었다. 하지만 시장 내 장옥 상당수가 지은 지 오래되고 낡아 보수가 시급했고 일부는 쓰러지면서 외부로의 이전 논의가 있어왔지만 10년 동안 방치되다 예산을 확보한 193712월 봄의마을 장소로 시장이 옮겨졌다고 한다.

이후 봄의마을 일대에 형성됐던 서천재래시장은 재래시장 이전 재정비의 일환으로 2004년 현 서천특화시장으로 이전했다. 군은 1997년 시장조성부지로 매입한 현 서천특화시장 4400여평의 부지에 2001년부터 총 75억원을 투입, 지상 2층 연면적 1980평 규모로 장옥을 지어 20049월 개장했다. 서천특화시장 수산물동은 노량진수산시장의 경우처럼 활어를 구매해 2층 식당동에서 회를 맛볼 수 있어 전국에서 많은 관광객들이 찾는 명소로 자리매김했다.

현 청사 주민문화공간 서천마루로 재탄생

내년 3월이면 서천군청사가 만 585년만에 서천읍성 밖으로 이전한다. 이종무의 대마도 정벌로 금강하구에 출몰했던 왜구가 자취를 감추면서 세종조 연간에 남산성과 봉남산성에 있던 치소를 서천읍성 축조와 함께 옮겼다. 600년 가까이 서천의 흥망성쇠를 지켜본 서천읍성은 1914년 일제가 한산군과 비인군을 서천군으로 통폐합하면서 기존 읍성에서 행정중심지로 탈바꿈했다. 하지만 한곳에서 오랜 기간 동안 폐쇄적으로 머무르면서 새로운 도시를 형성하지 못하고 구도시 형태에서 탈피하지 못했다는 지적도 받고 있다.

한편 신청사 이전으로 현 청사는 주민문화공간인 서천마루로 재탄생한다.

다음호에서는 청사를 기억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라는 주제로 현청사에 관한 기억과 이에 얽힌 퇴직공무원, 성안마을 주민의 이야기를 들어보고자 한다.

 

화보로 본 서천읍성과 서천군청사

▲1872년 서천읍성내 관아배치도(자료제공 박수환 향토사학자)
▲1872년 서천읍성내 관아배치도(자료제공 박수환 향토사학자)
▲1872년 문산면 음적사 인근 서천군치소(자료제공 박수환 향토사학자)
▲1872년 문산면 음적사 인근 서천군치소(자료제공 박수환 향토사학자)
▲1872년 문산면 문장리 화리치소(자료제공 박수환 향토사학자)
▲1872년 문산면 문장리 화리치소(자료제공 박수환 향토사학자)
▲1872년도 남산성(영취산) 치소(자료제공 박수환 향토사학자)
▲1872년도 남산성(영취산) 치소(자료제공 박수환 향토사학자)

역대 군청사

▲1917년 서천군청 건축물 대장
▲1917년 서천군청 건축물 대장
▲1931년 서천군청 증축건물 배치도
▲1931년 서천군청 증축건물 배치도
▲1931년 서천군청 회의실 증축계획
▲1931년 서천군청 회의실 증축계획
​​​​​​​▲1948년 군청 현관 앞 주민(사진제공 박수환 향토사학자)
▲1948년 군청 현관 앞 주민(사진제공 박수환 향토사학자)
​​​​​​​▲1963년 서천군청사
▲1963년 서천군 청사
▲1964년 서천군 청사
▲1964년 서천군 청사
▲1965년 서천군청사
▲1965년 서천군청사
​​​​​​​▲1966년 4월29일 서천군 청사 낙성식 모습
▲1966년 4월29일 서천군 청사 낙성식 모습
▲1966년 준공된 서천군청 본관
▲1966년 준공된 서천군청 본관
▲1971년 군청사 현관 단체사진
▲1971년 군청사 현관 단체사진

드론촬영

▲서천군청사와 민원인 주차장(1937년까지 재래시장이 운영됨)
▲서천군청사와 민원인 주차장(1937년까지 재래시장이 운영됨)
▲서천읍 동문에서 바라본 서천군 신청사
▲서천읍 동문에서 바라본 서천군 신청사
▲성안마을 전경
▲성안마을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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