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모시장터 / 석북 신공 묘지명 石北申公墓誌銘
■ 모시장터 / 석북 신공 묘지명 石北申公墓誌銘
  • 신웅순 칼럼위원
  • 승인 2022.11.24 10:29
  • 호수 112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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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웅순 칼럼위원
신웅순 칼럼위원

석북 신광수 선생 묘소에 시조명칭 유래비를 세울 때의 일이다. 2014년 가을이다. 시조 시인들, 종친들이 석북 선생 관련 논의를 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종친 대부께서 어렸을 때 -7.80년은 족히 되었을 것 같다- 백비를 땅에 묻는 것을 보았다는 것이다.

아니, 백비라니요?”

우리나라에 오직 하나 밖에 없다는 명종 임금의 청백리 박수량 백비가 머리를 스쳐갔다.

백비는 석북 묘소 근처에 묻혀있었다. 현 비와 나란히 백비를 세웠다. 백비는 청백이 오히려 누가 되니 비문 없는 비를 세우라라는 명종임금의 명으로 세워진 박수량의 비가 국내 유일하다.

실록에 석북의 백비에 대해서는 어떤 기록도 없다. 백비였으면 없을 리 만무한데 그것이 이상했다. 이후 8년이 흘렀다.

얼마 전 향토 사학자 박수환 님, 학예사 김향숙 님과 함께 다시 백비를 찾았다.

교수님, 이 비는 백비가 아니예요. 글자가 있어요.”

자가 보였다. 박수환 님이 기뻐 덩실덩실 춤을 추는 것이었다. 여지껏 우리들은 백비인 줄만 알았다. 박수환 님이 아니었으면 촌극이 벌어질 뻔했다.

?”

자세히 보니 눈으로 알아 볼 수 있는 것은 한 두 글자였을 뿐 글자들이 거의 다 갈려져 있거나 지워져있었다. 분명 묘지명이었다. 길고도 깜깜했던 수수께끼가 풀리는 순간이었다.

박수환 님의 석북에 대한 열정이 우리의 먼 눈을 뜨게 했다. 지워지지 않은 글씨가 희미하게나마 일부가 남아 있었다. 8년 동안 시인들, 종친들 전부는 다 심봉사들이었다. 자세히 살펴보지 못했던 탓이다. 대리석 백비였지 누구도 묘지명이라는 것을 생각하지 못했다. 글씨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마터면 묘지명이 백비로 둔갑할 뻔했다.

▲화양면 대등리에 있는 석북 신광수의 묘. 가운데가 묘지명
▲화양면 대등리에 있는 석북 신광수의 묘. 가운데가 묘지명

그제서야 석북가를 연구한 종친 구순 형님께서 번암집에서 옛날에 석북 묘지명을 어렴풋 본 기억이 있다고 했다. 그 때서야 기억을 떠올린 것이다. 박수환 님은 비문은 번암 채제공이 짓고, 석북 동생 진택 신광하가 글씨를 썼다는 1898년도판 고령신씨 4회보를 증거 자료로 보내왔다. 김향숙 님은 1900여자가 되는 그 많은 글자의 묘지명을 친히 번역해주었다.

석북은 번암 채제공에게 평양 감사 부임시 관서악부라는 전별시를 써주었던 절친한 친구이다. ‘시조명칭이 처음 나온 것도 바로 이 문헌이었다.

번암의 석북 묘지명엔 이런 구절이 있다.

군이 일찍이 벼슬하지 않은 선비로 관서의 비류강을 주유하였다. 하루는 맑은 물이 흐르는 절벽 아래에 정박하였는데, 관서 지방 인사들이 찾아와 자리가 비는 날이 없었다. 당시 관서의 관찰사인 정휘량이 군의 이름을 흠모하여 객사에서 만나 교유하고자 하였다. 군은 끝내 가지 않았으니 그 자중함이 이와 같았다. - 학예사 김향숙 역

어떤 정치적인 이유가 있었던 것이었을까. 필자로서는 알 수 없다. 채제공은 이를 에둘러 말한 것 같다. 석북이 만나주지 않아 상대측은 무시당했다고 생각했고 자존심도 많이 상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당시 정휘량 가는 최고 권력의 정점에 서 있었으니 그럴 만도 했을 것이다. 이 몇 줄이 묘지명을 그렇게 만들었던 것일까. 추측에 추측을 더할 뿐 숨겨진 진실은 지금도 알 수가 없다.

박수환 님은 이를 이렇게 설명했다.

정휘량은 정조의 부친 사도세자를 죽이는데 앞장 선 인물이다. 또한 정휘량의 조카 정치달의 숙부로 정치달은 영조의 딸 화완옹주와 결혼하여 부마가 된 집안이다. 당대 권력의 정점에 있었던 집안이었다. 그 후손들이 비석에 대하여 문제를 삼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잘 사는 군민, 살고 싶은 서천역사탐방,2022.10.25.,371

대리석이 철저하게 갈려져 있었다. 누가 이렇게 만들었을까. 후환이 두려웠던 것일까. 자손 후대에 부끄러웠던 것일까. 협박? 만 가지 생각들이 스쳐갔다. 그도 부족해 땅에까지 묻혀졌으니 말이다. 뭉개진 비를 보니 소름이 돋는다. 아무도 이를 증언해줄 사람이 없다. 돌비의 침묵은 250년도 훌쩍 넘었다. 글자가 사라졌으니 돌비인들 어찌 말할 수 있을 것인가. 대시인 석북 행장을 대정치인 채제공이 썼음에도 그 돌비가 후대에 와 묻히는 수모를 당했으니 당시 남인의 몰락을 증언해주는 비극의 상징물은 아니었을까.

기록은 언제라도 진실을 말한다. 채제공의 석북 묘지명이 없었던들 돌비는 영원히 침묵했을 것이다. 진실은 몇 글자를 지운다 해서 전부가 가려지는 것은 아니다. 마지막 한 자가 남아 그날을 증언해주는 것이 역사이다.

충남 역사문화 연구소에서 전자 판독기로 스캔해 갔으나 비문 판독 불가였다. 원문이나마 남아 있으니 불행 중 다행이다. 그날의 역사와 문화의 자리매김은 알 수 없는 거기까지가 인연이 되고 말았다.

육안으로 볼 수 있는 글자는 자 외에 한 두 글자뿐이다. ‘자는 채제공의 석북 묘지명에는 단 한 자밖에 없는 글자이다. 그 한 자가 판명이 되었으니 이미 묘비명이라는 것이 증명이 된 셈이다.

과 연이 있으면 과가 있는 법이다. 이 묘지명 자 글자 하나가 백비에서 묘지명으로 바뀌는 계기가 되었으니 기록의 힘이 얼마나 위대한 것인가를 새삼 느끼게 된다. 지금도 묻혀진 역사적 사실들이 얼마나 많이 있을 것인가.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 박수환, 학예사 김향숙 님께 감사의 말씀을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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