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고 / 봉서사 편액
■ 기고 / 봉서사 편액
  • 신웅순 칼럼위원
  • 승인 2022.12.01 08:57
  • 호수 112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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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서사 극락전
▲봉서사 극락전

서천 한산에는 건지산성이 있다. 백제 부흥운동의 거점으로도 알려진 곳이다. 어렸을 적 우리들의 초등학교 소풍지이기도 하다. 산기슭엔 공주 마곡사 말사인 봉서사가 있다.

이 절에 조선 후기 대시인 석북 선생의 친필 극락전편액이 있었다. 다시 찾았을 때는 그 편액은 없어지고 다른 편액이 걸려 있었다. 당시 주지 스님에게 물어보았더니 모른다고 했다. 20년도 훌쩍 넘은 오래 전의 일이다.

석북 신광수 선생은 윤선도의 증손, 공재 윤두서의 사위이다. 윤두서는 정약용의 외증조부이기도 하다. 시인 신석초 선생이 석북 7대 손이고 필자는 8대 손이다.

▲바뀌어진 극락전 편액
▲바뀌어진 극락전 편액

봉서사는 석북 신광수 선생을 비롯 월남 이상재 선생, 석초 신응식 시인이 젊었을 적 공부했던 유서 깊은 곳이기도 하다.

석북이 젊어서 수학을 하고자 절에 간 첫날밤 이슥한 때 주지승이 목탁을 두드리며 염불을 했다. 다음날 주지를 불러 어젯밤 염불한 경 가운데 어디 어디가 잘못된 것이 아니냐고 조목조목 짚으니 주지가 탄복하며 말하기를 소승 뿐 아니라 모든 중들이 평 생을 외워도 틀리는 곳이 많은 데 시주는 한번 듣고 지적을 하니 참으로 천재로다 하 고 탄복했다고 한다-신구순의 어성 신담과 그 가계

석북에 대해 집안에 전해오는 일화 한 토막이다. 5세에 이미 책을 읽고 쓸 줄 알아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고 한다. 중국의 백거이와 비견할 만한 시인으로도 알려져 있다. 춘원 이광수가 흠모한 나머지 이름을 보경에서 광수로 개명했다고도 한다. 가난했으나 천재끼가 있으셨었던 것은 사실인 것 같다.

석북 선생은 어렸을 때부터 봉서사와 깊은 인연이 있었다. 석북이 봉서암에 수학한 것으로 보이는 기록이 시에 전하고 있다. 175745세에 지은봉서사의 달밤이다.

산허리엔 나는 듯한 누각이 흐르는 강물에 굽어 섰고
강남에 달이 뜨니 수십 고을이 밝구나
서늘한 나무그늘에는 북쪽으로부터 날아온 새가 깃들고
저녁 종치는 승려는 서쪽 누각에 서 있구나
배회하는 그림자는 천 개의 봉우리로 둘러싸인 사찰에
고요한 마음은 만리 떠나가는 배에 매어 있구나
일찍이 봉서암에 머물던 객은
옷가지 이슬에 가득 젖어 또 다시 새 가을을 맞이하네

- 신광수의중대월야 中臺月夜」 (김향숙 번역)

일찍이 봉서암에 수학했던 때를 회상하며 쓴 시이다. 서쪽 누의 범종, 금강물, 수십 고을, 즈믄 산봉우리 등 달 밝은 밤에 쓴 당시의 정황을 짐작할 수 있다.

내 인생에 있어서 절과의 첫 만남은 봉서사였다. 절하면 지금도 봉서사가 제일 먼저 떠오른다. 소풍 때 오가며 장난치며 놀았던 곳이기도 하다. 아득한 파스텔톤 기억이 지금까지도 내 가슴에 따뜻하게 남아있다.

풍경소리 어둠 밖을
등잔불 이어가고

한올 한올 숨을 뽑아
무릎에 감는 슬기

온 밤을 잉아에 걸고
백마강물 짜아가네

- 신웅순의 한산모시5

40년 전에 썼던한산모시 15수 중 다섯 번째 수이다.

어린 시절 봄날 같은 봉서사의 언덕, 풍경과 요사채의 등잔불, 봉서사를 생각하며 썼다. 옛날 모시 삼던 어머니의 모습을 떠올리며 썼다. 토담 움막에서 철컥철컥 모시 짜는 이웃 아낙의 새벽을 생각하며 썼다.

60년 세월이 지났으나 패망한 백제 왕조, 유민들의 한, 금강물, 연인, 베틀, 모시, 석북 등의 한들은 지금도 내 인생에서 애틋하고 특별한 그리움의 공간으로 남아있다. 그 곳이 봉서사였고 작품한산모시15수의 일부 배경이 된 곳이기도 하다. 이 한산모시 15수는 30살 즈음에 썼다.

석북 선생이 수학한 지 두 세기 하고도 반세기가 넘었다. 숙명적인 인연이었을까. 나의 선조가 수학했던 봉서사는 나에게는 아늑하고 따뜻한 고향 같은 곳이다.

석북 선생이 언제 극락전편액을 썼는지는 알 수 없다. 주지 스님은 애초에 석북의 편액이 걸려있는 줄 몰랐다고 한다. 세월도 흘렀고 주지 스님도 몇 번 바뀌었을 것이니 특별한 관심 아니면 알 리가 없었을 것이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했다. 불에 타지 않았으면 어디엔가는 남아있을 것이다. 간곡한 부탁이 헛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리움은 언제나 어디쯤서 돌아오고 마는 것인가. 까마득 잊었던 어렸을 적 봉서사의 풍경소리를 다시 듣고 싶다. 아니 내 가슴 처마 끝에 매달려 지금도 떼엥땡 울고 있다. 오늘도 거기까지 가을바람이 불고 거기까지 가을비가 내리는 것인가.

2022.10.7.() 종친 신홍순, 신구순 형, 향토사학자 박수환 님과 동행하다. 박수환 님이 석북시봉서암의 달밤을 필자에게 보내왔다. 감사드린다.

<여여재, 석야 신웅순의 서재. 2022.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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