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고 / 석북 신광수 유적을 찾아
■ 기고 / 석북 신광수 유적을 찾아
  • 신웅순 칼럼위원
  • 승인 2022.12.08 07:34
  • 호수 112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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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정우조 茅亭雨眺
▲모정재 부근에서 바라본 화양 들판
▲모정재 부근에서 바라본 화양 들판

석북 신광수 선생의 시 모정우조의 유적지를 찾아나섰다. 모정에 내리는 봄비47세 때의 작품이다. 이 때는 과업도 그만 둔, 부인 윤씨 상을 당한 3년 째 되는 해이다.

이른 봄이다. 아침 나절부터 봄비가 내렸다. 석북 선생은 모종을 하고 모정재에 올랐다. 모정재는 서천군 화양면의 활동리와 대등리 사이에 있는 작은 언덕이다. 여기에 띠풀로 엮은 작은 정자가 있다. 석북 선생은 때때로 거기에 올라 복잡한 머리를 식히곤 했다.

금강 가까이 비가 오는 먼 들녘과 좌우의 낮은 산들을 바라보았다. 오후에도 봄비가 보슬보슬 내렸다. 들녘으로 해오라기가 날고 산 아래에선 연기가 피어올랐다. 산밭에선 사람들이 밭을 갈고 있다.

어찌 시 한 수가 없으랴.

내리던 봄비가 잠시 그쳤다. 도롱이를 내려놓고 지필묵을 꺼냈다. 천천히 벼루에 먹을 갈았다. 만가지 상념들이 오고 갔다. 선생은 한참 눈을 감았다 떴다. 그리곤 붓에 먹물을 듬뿍 묻혀 단숨에 일필휘지 했다.

 

동녘 산 언덕에 산책하노니

질펀한 들로 먼 빛이 연하였네

빗속에 흰 해오라기가 날고

산 밑에서 파란 연기가 솟아오르네

마을마다 숲을 비쳐 물이 번번하고

언덕마다 사람들은 밭을 간다

나도 자잘한 채소를 가꾸노라

초당 앞에 모종을 하였네

-석북 신광수모정우조

 

한가롭고 평화로운 풍경이다. 불혹 후반의 석북 선생에게 시가 얼마나 많은 위로가 되었던가. 달관된 삶의 모습을 편린이나마 예서 만나 볼 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모정은 어디에 있었던 것일까.”

종친 형은 선대로부터 이 재에 모정이 있었다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시 한 구절 한 구절 멀리 펼쳐진 풍경을 짚어가며 그림의 쪽수를 맞춰 나갔다. 종친 형은 어렸을 적 학교 다니던 길을 상기시키며 한 발짝 한 발짝 그 길을 답사해 나갔다. 새도로가 생기기 이전이다. 옛길은 없어지고 풀과 숲만이 무성하게 우거져있었다. 옆에는 서낭당이 있었다지만 흔적조차 없다.

앞이 탁 트인 이 지점 같아.”

우리들은 그 곳에 섰다. 석북 선생이 모정에서 바라보았듯 우리도 먼 그 쪽을 향해 바라보았다. 넓은 들과 낮은 산들의 퍼즐들이 하나하나 맞춰졌다. 그 곳은 모정을 지을 만한 언덕 위의 평평한 땅이었다.

무엇 때문에 우리들은 선대의 유적을 찾고 있는 것일까. 당시의 생활상은 우리의 생활상이자 우리의 정체성이자 문화이다. 이를 잊어버리면 우리는 없다. 그것은 바로 나를 찾아가는 구도의 길이기도 하다. 당시를 알면 오늘을 이해할 수 있고 오늘을 이해하면 미래를 만날 수 있다.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다 하지 않는가.

모정은 사라지고 시에만 그 흔적이 남아있다. 이마저 없었다면 석북 선생 삶의 일편을 짐작이나 할 수 있었겠는가.

언덕엔 오르고 내려가는 꼭지점이 있다. 누구나 인생엔 그런 아픈 꼭지점들을 두 서너개씩은 갖고 있다. 석북 선생이 모정에서 시 읊는 모습을 상상해본다. 바람도 읽고, 비도 읽고, 눈발도 읽고 갈 석북 선생의 시모정우조, 내 마음의 표석 하나를 여기에 세운다.

석북 선생이 바라보았던 저 변함없는 금강 들녘과 하늘가이다. 수백년 흐른 지금에도 시가 없었다면 아름다운 저 금수강산을 우리는 어찌 바라볼 수나 있을까.

함께 안내해주신 종친 구순형, 향토 사학자 박수환 님께 감사의 말씀을 올린다.

<여여재, 석야 신웅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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