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일환의 낱말 여행 (30) / 동문빨래
■ 박일환의 낱말 여행 (30) / 동문빨래
  • 박일환 시인
  • 승인 2023.01.12 08:35
  • 호수 1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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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래’의 방언 ‘서답’
박일환 시인
박일환 시인

다른 이와 대화할 때 어떤 상황에서 가장 속이 터질까? 서로 입장이 달라서 평행선을 달리는 대화를 하다 보면 짜증이 일어나는 게 사람 심리다. 그래서 당신과는 말이 안 통한다고 하면서 화를 내는 경우를 자주 본다. 그럴 때는 서로 한 발짝씩 물러나서 비록 의견 일치는 보지 못했지만 당신의 입장도 충분히 이해한다며 대화를 마무리짓는 게 관계를 상하지 않도록 하는 현명한 방법이다. 세상사를 따질 때 옳고 그름이 늘 명확하게 나뉘는 건 아니기 때문에 둘 다 맞을 수도 있고 둘 다 틀릴 수도 있다. 그런 사실만 인정해도 사람 사이의 다툼을 웬만큼은 방지할 수 있다.

입장 차에서 오는 답답함보다 더 속이 터지게 만드는 건 내 말에 상대가 엉뚱한 대답을 할 때가 아닐까? 어떤 영화를 좋아하느냐고 물었는데, 바다가 보이는 곳으로 여행을 가고 싶다는 식의 말이 돌아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어쩌다 한두 번도 아니고 자주 그런다면 그 사람의 심리가 궁금해지기도 한다. 자신이 감당하기 힘들거나 하기 싫은 일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때 일부러 딴청을 부리고 싶은, 일종의 회피 심리에서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그렇게 애써 이해를 한다 해도 답답함이 해소되지는 않는다. 그래서 동문서답을 하는 사람과는 더 이상 말을 섞고 싶지 않을 때가 많다.

표준국어대사전에 동문서답(東問西答)’을 낮잡아 이르는 말이라는 뜻을 담아 동문빨래라는 낱말을 표제어로 올려놓았다. 동문 다음에 왜 빨래라는 말이 붙었으며, 그게 왜 동문서답을 이르는 말로 사용되었을까? 무척 궁금했지만 한참 생각해 봐도 의문이 풀리지 않았다. 나만 그런 당혹감을 느끼지는 않았으리라 믿는다. 그러다가 퍼뜩 머리를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서답을 한자어 서답(西答)’에만 붙들어 놓아서는 안 된다는 것, 즉 고유어 서답이 따로 있다는 데 생각이 미친 것이다.

서답을 국어사전에서 찾으면 개짐이나 빨래를 가리키는 방언이라고 나온다. 개짐이라는 말이 낯설게 다가오는 이들이 있을 텐데, 과거에 여성들이 생리할 때 샅에 차던 헝겊을 말한다. 국어사전에서 개짐은 표준어로 처리했지만 서답은 방언으로 분류해 놓았다. 그런 분류와 상관없이 개짐이나 서답은 그런 낱말이 있다는 사실 자체를 아는 이들이 드물어지면서 거의 사어(死語)가 되다시피 했다. 처음 표준어 사정을 할 무렵 국어학자 홍기문이 조선일보(1935.1.5.)표준어 제정에 대하야라는 제목으로 기고한 글에 개짐과 서답이 나온다.

서울서는 개짐만을 서답이라고 하는데 다른 만흔 지방에서는 보통의 빨래를 모도 다 서답이라고 하니 여긔 대하야도 취사찬택을 행하지 안하면 안 될 것이다.”

그래서 지방에서는 빨랫방망이를 서답방망이라는 말로 부르기도 했다. 어쨌든 서답이 지역에 따라 뜻이 다르다는 이유로 표준어에서 빠지면서 방언으로 처리되었던 모양이다. 서답이 빨래를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다는 사실에 착안해 동문서답을 동문빨래라는 말로 바꿔치기(?)한 데서 선조들의 해학을 엿볼 수 있다. 옛사람들이 이런 식으로 말놀이를 즐기던 사례는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십 리 밖에 있어도 오리나무같은 속담이 그런 예이다.

서답과 관련해서 서답방이라는 낱말 하나가 더 표준국어대사전에 올라 있다. 궁중 사람들이 빨래터를 이르던 말이란다. 한편 세답방(洗踏房)’이 별도 표제어로, ‘조선 시대에 둔, 궁중의 육처소 가운데 하나. 빨래와 다듬이질, 다림질 따위를 맡아 하던 곳이라는 풀이를 달고 있다. 서답이 세답(洗踏)에서 왔을 것이라고 하는 이들이 있으나 확실치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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