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송우영의 고전산책-임금이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못하는 신하
■ 송우영의 고전산책-임금이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못하는 신하
  • 송우영
  • 승인 2023.03.01 17:57
  • 호수 113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송우영 / 서천서당 훈장
송우영 / 서천서당 훈장

맹자 책 공손추장구상 2-11 문장에서 공손추는 스승 맹자께 호연지기浩然之氣에 대해 묻는다. 호연지기란 지극하면서도 크며 굳세어서 정직함으로 길러내야 해로움이 없는 것으로, 이를 쉽게 설명하기 위한 답변으로 같은 장 2-16문장에서 맹자는 우화 한 토막을 예로 들면서 송나라의 어리석은 농부의 농사일을 말해준다.

원문은 ‘송인宋人유민기묘지부장이알지자有閔其苗之不長而揠之者’ 이렇게 되는데 여기에 눈여겨볼 글자는 유有와 자者인데 이는 간접화법으로 요즘 말로 한다면 ‘카더라’ 쯤으로 이해되는 문장이다. 곧 유有와 자者는 ‘-- 자가 있었다’ 또는 ‘-- 한 사람이 있었다’ 인데 내용을 옮겨보면 이렇다.

송나라 농부 중에 벼 싹이 자라지 못함을 안타깝게 여겨 벼를 조금씩 잡아당겨 벼가 쑥쑥 큰 것처럼 뽑아놓은 자가 있었다.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내가 벼 싹이 자라도록 도왔다며 가족들에게 말하니 아들이 이 말을 듣고 얼른 논으로 나가보니 벼 싹은 모두 말라 죽었다.

본래 ‘알묘조장揠苗助長’에서 조장助長은 ‘도와서 자라게 한다’로 나쁜 뜻이 아닌데 알묘揠苗라는 속성으로 키워낸다는 벼에게 있어서는 빨리 자라게 하는 것은 곧 말라 죽는다는 말이 되기에 위험한 것이다. 벼는 인위적으로 성장을 조장하는 것이 아니라, 심었으면 스스로 뿌리를 내리고 자랄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것으로 우공이산愚公移山의 고사와 대척점에 서 있는 성어이기도 하다.

장자의 우화에도 이와 비슷한 말이 있다. 오리의 다리가 짧다고 그것을 잇지 말며<부경수단鳧脛雖短 속지즉우續之則憂> 학의 다리가 길다고 그것을 끊지 마라.<학경수장鶴脛雖長 단지즉비斷之則悲> 기본을 건너뛴다던가. 원칙을 무시한다던가. 조급하게 구는 것은 호연지기를 기름에 전혀 도움이 안 된다는 것이다.

쉽게 말하면 ‘차근차근 가르치고 천천히 배워라’ 쯤으로 이해되는 말이기도 하다. 공부에는 지름길이 없다. 공부는 잘하고 못하고를 불문하며 현賢우愚를 따지지 않는다. 날 때부터 똑똑한 사람이 있을 것이고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을 것이다. 다만 포기하지 않는다면 그 뒷일은 나의 할 일을 다 한 연후에 하늘의 뜻을 기다린다는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의 경지에 이를 것이다. 논어 자한편 9-18 문장은 이렇게 기록한다.

“공자님 말씀에<자왈子曰> 비유컨대 산을 만들면서<비여위산譬如爲山> 한 삼태기를 미처 더하지 않아 완성 시키지 못한 채<미성일궤未成一簣> 그치고 만 것도<지止> 내가 그친 것이며<吾止也>, 비유컨대 평지에 산을 만들면서<비여평지譬如平地> 비록 한 삼태기 밖에 덮지 않았지만<수복일궤雖覆一簣> 계속 나아가는 것도<진進> 내가 계속 나아가는 것이다.<오왕야吾往也>”

쉽게 말해서 ‘공부를 멈춤도 내가 하는 일이고 공부를 나아감도 내가 하는 일이다’는 말이다. 공부에 있어서만큼은 꾸준히 노력할 망정 스스로 중단하는 일은 저지르지 말라는 경책이다. 논어 자한편 9-20 문장에서 공자께서 제자 안회를 두고 이렇게 평한 바 있으시다. “나의 제자 안회는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것만 봤지 그가 공부를 멈추는 경우를 본 적이 없다.”

물론 사람이 공부했다고 해서 모두 다 성공하는 것은 분명 아닐 터. 그러나 그런 것은 공부한 다음에 따질 일인 것이다. 그래서 논어 자한편 9-21 문장에서 공자께서도 말씀하신 바 있으시다. “싹만 틔우고 꽃을 피우지 못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묘이불수자유의부苗而不秀者有矣夫> 꽃까지는 피웠으나 열매는 못맺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수이부실자유의부秀而不實者有矣夫> 피세은일避世隱逸의 삶을 살지 않을 바라면 공부해야 한다. 옛글에 이르길<석서운昔書云> 본시 가난이란<시빈자始貧者> 선비에게 늘 있는 일이고<士之常也> 본시 죽음이란<시사자始死者> 백성에게 삶을 마침이거늘<민지종야民之終也> 먹는 것에 배부름을 구하지 않으면서<식무구포食無求飽> 사는 것에 편안을 구하지 않으면서<거무구안居無求安> 오직 날마다 공부가 있다면<유유일학惟有日學> 어찌 즐겁지 않으랴.<하불낙야何不樂也>”

그렇다면 어디까지 공부해야하는가? 진서 晉書 권卷 51에 ‘하유불명지신下有不名之臣’이라 했다.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못하는 신하의 경지까지 공부해야 한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