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송우영의 고전산책 / 공자의 둔한 제자 세 사람
■ 송우영의 고전산책 / 공자의 둔한 제자 세 사람
  • 송우영
  • 승인 2023.03.10 12:15
  • 호수 114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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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우영/서천서당 훈장
송우영/서천서당 훈장

공자의 제자 중에 공부가 힘겨울 정도로 어려웠던 제자가 셋이나 있다. 공자는 너무 크신 분이라 차마 가까이 못 하고 공자의 수제자인 자로를 스승처럼 따랐다는 고시가 있고, 공자 문하에서 아둔하다는 공식적인 평가를 받은 증자가 있고, 하나를 알려주면 겨우 둘쯤 생각해 낼 정도로 식견이 밝지 못하다는 평가를 받은 자공이 그다.

자로를 스승처럼 따른 고시는 꽤 어리석었던 인물이다. 공자는 논어 선진편 11-17문장에서 시야우柴也愚라 평했다. 고시는 어리석다는 말이다. 어리석은 고시는 어리석은 자답게 어리석은 다짐을 했다 전하는데 병들어 죽는 일은 없게 하겠다며 흔히 말하는 영선도인법嬰僊導引法을 처음 시작한 이다. 요즘에는 영선이라는 말에 고시가 신선이 됐다 하여 신령령자에 신선선자를 쓰기도 하는데 그건 그들 몫인거고, 영선嬰僊이라는 것은 해제지동孩提之童의 몸짓을 말한다. 곧 아버지 바짓가랭이를 잡아당길 정도의 어린아이 몸짓쯤 된다.

고시는 음식이라야 하루에 정해진 끼니 외에는 그 무엇도 먹는 일이 없었으며 특별히 하는 운동은 식후에 하루 다섯번씩이나 청소하는 게 전부라 했다. 자신의 방을 청소하고 스승처럼 모시는 자로의 방을 청소하고 큰 스승 공자님의 방을 청소하고 그리고 나머지 시간은 공부했다 전한다. 고시가 밥만 먹고 나면 청소를 해대는 탓에 공자의 학당은 늘 깨끗했다 한다.

이렇게 하여 밥 먹고 한 번도 안 거르고 청소를 해서 그랬는지는 모르나 죽는 날까지 단 한 번도 아팠다는 기록이 없다. 그가 죽은 나이는 126세라고도 하고 또 각 지역의 이언에 따르면 맹자가 어렸을 때까지 살았다고도 하고, 신선이 되어 죽음을 모르고 갔다고도 하고 암튼 그의 졸기는 없다.

증자의 경우는 공자 문하에서 공식적으로 아둔하다고 평가된 인물이다. 논어 선진편 11-17문장은 이렇게 기록한다. “삼야노參也魯 증삼은 아둔하다. 공부를 못 하는 자가 성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공부하는 길이다는 것을 증명해낸 이가 증자다.

증자의 공부법은 전불습호傳不習乎. 배웠으면 무조건 다 외우는 거다. 북송의 학자 육전의 가르침에 따르면 공자 학당 뒤켠에 나무에 대고 배운 것을 혼자 중얼거리면서 떠들어대는 것이다. 누가 듣든지 말든지 외운 것을 모조리 나무에 대고 가르치는 거다. 이게 증자의 공부법이다.

흔히 말하는 가르치면서 배우고 함께 성장한다는 교학상장敎學相長을 온몸으로 무식하게 실천한 인물인 셈이다. 증자는 본인이 본인을 믿어 증명해낸 인물이다. 이를 주자의 사위 채침은 제자들에게 설명하기를 사람은 자신이 인정한 만큼 크게 되어있다고 했다 전한다.

횡거 장재가 아무것도 모르는 약관의 청춘시절에 뭐 좀 아는 것처럼 천하를 다니며 지식을 자랑하고 다녔다. 그야말로 떠벌이인 셈이다. 한번은 재상 범중엄을 만나 대화를 나눠본 뒤 처음으로 자신이 무식한 ?’이라는 것에 치욕을 느꼈다 한다.

범중엄이 그런 그에게 자신이 깔고 앉던 호피 방석과 중용 책을 주면서 호랑이 가죽 방석이 구멍 날 때까지 이 중용 책을 다 읽고 나를 다시 찾아오시게,”라고 말했다. 횡거 장재는 재상이 건네준 호피방석 바닥이 두 번씩이나 구멍이 날 때까지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공부했다한다. 이제 갓 스무 살도 됄까 한 청춘이거늘 얼마나 치욕이 사무쳤으면 그랬을까. 훗날 그는 북송오현이라는 주자를 뛰어넘는 현자의 반열에 올랐다.

오로지 공부 하나만으로 인생을 반전시킨 인물이다. 그리고 자공의 경우는 늘 안회와 비교되는 인물이었다. 논어 공야장편에 따르면 안회는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알지만 자공은 하나를 들으면 겨우 두 개만 알뿐이라고 스스로 말한 바 있다. 그러자 공자께서도 인정하시길. “맞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 얼마나 뼈아픈 얘긴가. 어쩌면 자공은 그 분풀이로 돈을 그렇게 많이 벌었는지도 모른다.

공자가 자로를 제자로 둔 뒤로는 저자거리에서 손가락질 받는 일이 없었고 공자가 자공을 제자로 둔 뒤로는 죽는 날까지 돈 걱정 하는 일이 없었다 한다. 자공이 얼마나 부자였는가 하면 나라를 세 개 정도 사고도 남을 만큼 돈이 많았다 한다. 물론 어느 정도 과장은 있다 쳐도 거부인 것만은 사실인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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