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조 후기의 시인 석북 신광수가 남긴 ‘관산융마’ 지금까지도 시창으로 불리며 널리 사랑을 받아왔습니다. 석북의 후손이자 뉴스서천 칼럼위원인 신웅순 중부대 명예교수가 석북 선생의 ‘관산융마’에 대해 글을 보내왔습니다.
‘관산융마’는 석북이 1746년 35세에 한성시에 2등으로 급제한 시이다. 글제는 ‘등악양루탄관산융마(登岳陽樓歎關山戎馬, 악양루에 올라서 관산 융마를 탄식하다)’이다. 관산은 관새의 산, 융마는 병란을 말한다. 악양루에 올라 고국의 전란을 탄식한 두보의 시 ‘등악양루’를 주제로 한 과시이다.
방이 나자마자 전국에 알려졌으며 관현 가사에 올라 악원, 기방에서 200년 동안 계레의 사랑을 듬뿍 받았던 행시이자 악부이다.(이기현,<석북 신광수문학연구>(도서출판보고사,1996)
석북 신광수(1712-1775)는 자는 성연이요, 호는 석북․오악산인이며, 관은 고령이다. 석북의 6대조 영원공이 목은 이색의 구지인 한산 숭문동으로 이거한 후 한산이 고령신씨의 본거지가 되었다. 전대에도 문한이 면면히 끊어지지 않았으나 석북에 이르러 석북 4남매가 모두 빼어난 시인으로 명성을 얻었으며 아우, 아들 ,손, 증손과 함께 ‘숭문 8문장’이라는 미칭까지 얻었다. 또한 석북 신광수는 번암 채제공, 해좌 정범조, 간옹 이헌경 그리고 여와 목만중과 함께 남인 문단 5봉산으로 불리워지기도 했다. 이가원은 일찍이 석북 가문의 명성과 인물 배출을 두고 “우리나라 허균과 그 누이 허난설헌까지 그런 가족이 있었고 중국에서는 소동파의 남매가 그런 가족이 있었는데 거기에 비견할만하다고 했다.
시창 ‘관산융마’는 칠언절구에 토를 달아 노래한 것으로 총 44구이나 시창으로 불리워질 때는 첫 2 구의 가락을 반복하여 부르기 때문에 첫 2구나 4구절까지만 노래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秋江寂寞魚龍冷
人在西風仲宣樓
梅花萬國聽慕笛
桃竹殘年隨白鷗
…… 하략……
가을 강은 적막하고 어룡은 차갑구나
사람은 서풍을 맞으며 중선루에 서있고
만국의 매화곡 자주 듣는 황혼의 피리소리
도죽 지팡이 짚고 남은 인생 백구를 쫒는구나
1연은 애향심, 2연 연민사상, 3연 충군애민, 4연 조국애, 총 4연 44구로 애국 애족과 우국충정으로 일관되어 있다. 형식과 내용이 잘 조화되어 있어 교방과 홍류계에 널리 애창되었으며 특히 평양 기생들에게 인기가 높았다. 노래가 구슬프고 아름다워 멀리 중국에까지 회자되기도 했다. 수심가조의 슬픈 곡조는 외침에 시달려온 우리 민족에게 많은 심금을 울려주었다. 일제하에서 서도창‘관산융마’를 들으면 눈물 흘리는 이가 많았다고 한다. 애조 띤 가락에다 나라를 걱정하는 내용이 맞아떨어져 민족을 잃은 설움과 일치했던 것이다.
‘관산융마’는 음역이 2옥타브가 넘으며, 자유스럽고 느린 한배에 구성진 시김새로 조이고, 꺾어 넘기는 가락이 굽이굽이 물 흐르듯 어딘지 모르게 처연함과 비장감을 자아내게 한다. 수성반주(隨聲伴奏)로는 단소가 쓰이며 속청의 알운성(戛雲聲) 창법에 가사, 시조의 창법이 섞여 있는 애조 띤 멋스럽고도 유려한 곡이다. 이런 연유로 오랫동안 우리 민족의 사랑을 받아왔으며 특히 문인들의 많은 사랑을 받아왔다. 수심가와 함께 1969년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춘원 이보경은 석북의 ‘관산융마’를 듣고 흠모한 나머지 아예 석북 이름인 광수로 개명을 했다는 일화가 전하고 있다. 일제 시대에는 유성기판으로「관산융마」창을 들을 수가 있었으나 지금은 구할 수 없다. 민간에서 잘 부르는 이가 있다 해도 기록상에 보이지 않는다. 기록상에 보이는 것은 영조 때 기생 목단과 일지춘이다. 그의 창은 유명했다. 얼마나 잘 불렀는지 석북의 기록을 보면 알 수 있다. (윤경수,<석북시 연구(정법문화사,1984).122쪽.)
석북의 시 ‘관산융마’에 대한 기록이다.
頭白名姬漢京 淸歌能使萬人驚
練光亭上關山曲 今夜何因廳舊聲
(余之西遊每携丹妓於湖樓畵舫間灯前月下丹妓輒唱余關山戎馬舊詩響遏行雲)
-신광수,<석북시집>권 7, 聞浿妓牧丹肄樂梨園戱寄 其一
명기 모란이 머리가 희어 한양성에 들어오니
맑은 노래 능란하게 불러 만인을 놀라게 하네
연광정 위에서 듣던 관산곡을
오늘밤 옛소리를 어쩌면 들을 수 있을까나
(내가 일찍이 평양에서 놀 때 매양 모란과 함께 경치 좋은 누각이나 멋진 배를 타 고 등잔불 앞과 달 아래에 있었다. 모란이 문득 관산융마를 노래하면 그 목소리가 지나가는 구름도 멈추게 하는 것 같았다.)
관산융마가 수백년 동안 만인의 사랑을 받은 것은 우리 민족의 성정과 부합되기 때문일 것이다. 유교의 덕목인 군신유의에 입각해있어 귀족 계급과도 맞아 떨어진다. 그렇기 때문에 관기용의 아악적 전형성에서 호응도가 높을 수 있었을 것이다. 석북의 아우 진택은 일찍이 연광정에서 패기 일지춘의「관산융마」를 듣고 사형 석북이 생각나 눈시울을 적셨다. 다음과 같은 시 한 수를 남겼다.
연광정 위에서 손수건을 적시어라
삼십년 동안이나 물색은 새로운데
관산융마 노랫가락을 풀어서 부르나니
자리에는 오로지 일지춘만 있구나
그 후 시창 ‘관산융마’는 전국 각처에서 서도창․경창․남창․문인창 등으로 만인에 회자되었다. ‘관산융마’의 구절을 차용한 시조들도 여러 편 있다.
‘관산융마’에 ‘동정여천파시추(洞庭如天波始秋) : 동정호 물빛이 하늘과 같아 물결이 가을을 알리는구나’라는 구절이 있다. 이 구절의 일부인 ‘파시추’를 따 파시추 선생이라는 별호까지 불러 주었으니 기녀들이 이 노래를 부르며 얼마나 열광했는지를 알 수 있다. ‘수심가’에 ‘동정여천이 파시추로구나’, ‘고고천변 수궁가’에도 ‘동정여천에 파시추’와 같은 구절들이 삽입되어있다. 관산융마가 대중들에게도 많은 인기와 사랑을 받아왔음을 알 수 있다.
이가원은 생존시 작품이 널리 애송된 이는 중국 시인 백거이를 들 수 있다면 우리 나라에서는 석북을 들지 않을 수 없다고 했다. 석북을 한국의 백거이라고 했다. 그만큼 널리 오랫동안 많은 사람들에게 그의 시가 애송되어왔기 때문일 것이다. 석북은 수많은 시를 지었다. 그 중에서 ‘관산융마’만큼 오랫동안 세인의 사랑을 받은 노래는 없다.
시인은 충남 서천군 화양면 대등리 묘소에 잠들어 있다. 과거의 낡은 체재를 일신하고 새 시풍을 세워 일세를 풍미했던 석북. 가난과 싸우며 일생 시만을 썼던 석북이다. 그의 형제 기록 광연, 진택 광하 그리고 누이 부용당의 석북 4남매는 모두가 시명을 날린 허균 남매 못지 않은 조선 후기의 뛰어난 시인이었다.
평양 감사 번암 채제공은 젊은 시절부터 만년까지 석북과 가까이 지냈다. 석북의 시명이 얼마나 높았었는지 그의 <번암문집>에서 당대의 이름난 선비들이 석북을 따를 자가 없다고 회억하고 있다.
‘관산융마’는 유감스럽게도 명창들에 대한 기록은 보이지 않은 채 창만 전해 오고 있다. 1950년까지는 서도창 기증보유자 장학선이 유명했고 1960년대 이후 인간문화재들이 불렀다. 평남 출신 가곡부분 인간문화재 김정연 여사는 관산융마를 제 4구까지 출반했고 또 가악부분 인간문화재 오봉녀 여사는 제13구까지 불러 전해오고 있다. 여창 가곡부분 인간문화재 김월하 여사는 1950년대부터 관산융마 창으로 온 인기를 독점했다. 음반으로 4구와 녹음은 18구가 국영방송국에 보관되어 있다. 그는 1.4 후퇴 때 피난 생활 중 현보 김태영씨에게 관산융마를 배웠다. 창이 독특하고 뛰어나 천재라 일컬었다. 그는 타고난 재질을 발휘하여 피난 생활 중에서도 명성을 날렸다. 관산융마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전국적으로 널리 애송되었던 한시창이었다. 지금은 김경배. 김영기, 김광숙, 한자이 등 인간문화재들과 그들 제자들에 의해 꾸준히 불리워져 내려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