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붓 한 자루에 인생을 걸었고
기존 통념에 정면으로 도전했다.
남아있는 한쪽 눈으로 속된 세계를
경멸했고 조롱했다.
신분제에 대한 반항과 예인으로서의
자존심을 끝까지 지켰다.
석북 신광수에게 영릉참봉은 1761 영조 37년 50세에 얻은 첫벼슬이었다. 여강은 신륵사, 청심루, 여말 명승 나옹의 의발과 목은 이색의 발자취가 남아있는 산수 수려한 곳이다. 1763년 사옹봉사로 임명될 때까지 여강에서 2년을 봉직했다. 이때 쓴 시 262편이 『여강록』이다. 「최북설강도가 崔北雪江圖歌」 한 편이 여기에 실려있다.
석북은 1763 계미년 정월 서울에 올라왔다. 이때 동갑내기 최북을 만났다.(1)
최북은 김명국, 장승업과 함께 조선 3대 기인 화가로 불리운다. 최북만큼 세간의 입에 많이 오르내린 화가는 흔치 않다. 그에게는 많은 수식어들이 붙어있다. 시․서․화에 능통하다 하여 삼기재(三奇齋), 붓으로 먹고 산다 하여 호생관(豪生館), 자신의 이름 ‘북北’을 파자해 만든 칠칠(七七), 머무는 곳이 바로 내 집이라는 거기재(居其齋), 메추라기, 산수화에 뛰어나다 하여 최메추리, 최산수화 등 그에게는 많은 별명들이 따라다녔다.
석북은 눈 덮인 강 설강도(雪江圖)를 최북에게 그리게 하고 「최북설강도가 崔北雪江圖歌」 한 수를 지었다.
최북이 장안에서 그림을 팔고 있으니
살림살이란 오막살이 네 벽 텅 비었는데
문을 닫고 종일토록 산수화를 그려대네
유리 안경 집어쓰고 나무 필통 뿐이구나.
아침에 한 폭 팔아 아침 밥을 얻어먹고
저녁에 한 폭 팔아 저녁 밥을 얻어먹고
날은 차갑고 손님은 헌 방석에 앉았는데
문 앞 작은 다리에는 눈이 세 치나 쌓였네.
여보게 자네, 내가 올 때 설강도를 그려주게
두미 월계에 저는 당나귀
남북 청산은 온통 허연 은빛이로구나
어부의 집은 눈에 눌리고 외로운 낚싯배 떴다.
어찌 꼭 패교 고산이라 풍설 속에
맹처사 임처사만 그려야 하는가.
나와 더불어 복숭아 꽃 물가에 배를 띄우고
설화지에 다시 봄산을 그려보게.
당시 최북의 서울 생활 단면이다.
“아침에 한 폭 팔아 아침밥을 얻어먹고, 저녁에 또 한 폭 팔아 저녁밥을 얻어먹고” 이렇게 석북은 최북의 곤궁한 현실을 사실적으로 묘사했다.
석북은 서울 오는 길에 두미(남양주시 조안면 현 팔당호), 월계(현 양평군 양서면 신월리)를 지나면서 눈 내리는 은빛 청산 두미강을 보았다. 최북에게 가슴에 담아둔 은빛 청산 설강도를 그려달라 청했다. 그리고는 풍설 속에 맹처사 임처사만 그리지 말고 복숭아 꽃 물가에 배를 띄우고 다시 봄산을 그려보자고 했다.
신분을 떠난 두 예인의 따뜻한 인간미와 최북 만년에 대한 연민의 정이 흐른다. 이심전심으로 서로가 마음이 통한 사이임을 알게 한다.
최북의 「공산무인도 空山無人圖」라는 작품이 생각난다. 아무도 없는 모옥 한 채, 그 옆에는 수북히 꽃망울 맺힌 두 그루 커다란 나무가 있고, 왼쪽에는 수풀 우거진 나지막한 계곡이 있다. 그리고 높지도 낮지도 않은 가깝고도 먼 산등성이가 있다. 심심한 듯 적막한 봄산. 물소리만이 깊은 정적을 깨뜨리고 있을 뿐이다. 비어있는 산과 흐르는 물, 때가 되면 절로 피는 꽃. 산도 비어있고 사람도 찾지 않는 유정 무정이요, 무정 유정인 자연 그대로 꾸밈이 없다.
이런 것이 석북이 최북에게 봄산을 그려보자고 한 이유가 아니었을까.
석북은 양반뿐만이 아닌 가객이나 유랑객, 기생, 화가 등 중인, 천민 할 것 없이 많은 사람들과 시를 통해 교류했다.
최북은 당시 유명한 화가였다. 애꾸눈이고 미천하였지만 긍지가 대단하여 여간해서는 그림을 그려주지 않았다. 그는 여항 출신이었으나 당시 정치 권력층에서 소외되고 있던 이용휴, 이익, 신광수, 신광하, 이광사, 정범조, 강세황 등 소론계와 남인계 학자 문인들과 가깝게 지냈다.
1766년 석북은 안산의 백상형(1705~1789)의 집에서 강세황(1713~1791), 엄경응(1696~1784), 허필 등 ‘사노회 (四老會)’에 참석한 일이 있었다.(3) 강세황은 만년에 석북의 「관서악부」를 친필로 써준 절친한 친구이기도 하다.
석북 집안에 여정 허필, 광지 강세황, 칠칠 최북의 세 점과 표암이 쓴 것으로 보이는 ‘설월풍화’ 글씨 한 점이 있는 <와유첩>이 전해오고 있다. 여기에서 강세황과 허필, 최북의 만남을 보여주고 있다. 화첩 중 칠칠 최북의 「영지와 난초」 그림 오른쪽에 “필의가 지극히 고풍스럽다 筆意極古”의 정란의 화평이 있고(4) 광지 강세황의 그림 오른쪽에도 정란의 글씨로 보이는 “고풍스럽고 아름답다 古雅” 글씨가 있다. 오른쪽 하단은 여정 허필의 그림이다. 와유첩은 처음 정란의 소유였으나 후에 신광수에게 넘어갔다. 신광수와 허필, 강세황, 최북, 정란과의 교유 관계가 어떠했는지 짐작해 볼 수 있는 자료이다. 이 중 신광수, 강세황, 허필, 엄경응은 안산 15학사이며 최북, 정란은 이들과 교유한 인물들이다.
안산15학사는 18세기 안산을 중심으로 문예적 교류를 했던 이용휴, 신광수, 강세황, 임희성, 허필, 유중임, 조중보, 엄경응, 이수봉, 최인우, 이맹휴, 이광환, 채제공, 박도맹, 신택권 등 남인 소북파 재야문인 학자들을 말한다. 당시 안산은 조선 후기 새 학문과 문화의 중심지였다.(5) 최북 그림의 영지와 난초의 ‘지란지교’는 누구와의 교류였을까. 이런 저런 생각을 하게 한다.
정란은 전문여행가이며 산악인이다. 백두산·금강산·묘향산·지리산·덕유산·속리산·태백산·소백산 등 전국의 명산을 두루 등반했으며, 백두산은 정상까지 올랐고 금강산은 네 차례나 밟았다고 한다. 정란은 여러 사람에게 자신의 여행을 이야기하며 글과 그림을 받았다고 한다. 그에게 글과 그림을 준 인사들로는 채제공·이용휴·강세황·최북·김홍도(6) 등인데 이들은 안산 15학사들이거나 이들과 교우가 있는 명사들이다. 최북이 죽은 후 석북의 동생 신광하는 「최북가」(7) 를 썼다.
그대는 보지 못했는가, 최북이 눈 속에서 죽은 것을
담비 가죽 옷에 백마를 탄 이는 뉘 집 자손이더냐
너희들은 어찌 그의 죽음을 애도하지 아니하고 득의양양하는가
최북은 비천하고 미미했으니 진실로 애닯도다.
최북은 사람됨이 참으로 굳세었다.
스스로 말하기를 붓으로 먹고사는 畵師라 하였네
체구는 작달막하고 눈은 외눈이었다네만
술 석잔 들어가면 두려울 것도 거칠 것도 없었다네
최북은 북으로 숙신까지 들어가 흑삭에 이르렀고
동쪽으로는 일본에 건너가 적안까지 갔었다네
귀한 집 병풍으로는 산수도를 치는데
그 옛날 대가라던 안견, 이징의 작품들을 모두 쓸어버리고
술에 취해 미친 듯 붓을 휘두르면
고당 대낮에 강호가 나타나네
열흘을 굶다가 그림 한 폭 팔고는
크게 취해 한밤 중 돌아오던 길에
성곽 모퉁이에 쓰러졌다네
묻노니 북망산 흙 속에 만골이 묻혔건만
어찌하여 최북은 삼장설에 묻혔단 말인가.
오호라 최북은 몸은 비록 얼어 죽었어도
그 이름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으리.
최북에 대한 추도가이다.
최북이 누구이고 어떻게 살아왔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열흘이나 굶주린 끝에 그림 한 폭 팔아 술을 마시고 돌아오다 얼어 죽었다. 최북이 눈 속에 얼어 죽은 것을 그대는 보지 못했는가, 갖옷 입고 백마 탄 너희들 대체 뉘 집 자식인가. 너희들은 제멋대로 하고 그의 죽음을 슬퍼할 줄도 모르니, 최북의 미천한 처지가 참으로 애달픈 일이라. …… 아! 최북이여, 몸은 비록 얼어 죽었으나 이름은 길이 지워지지 않으리.
최북의 풍설야귀인도 風雪野歸人圖」가 생각난다. 「풍설야귀인도」는 당의 유장경의 시를 그림으로 그린 시의도(詩意圖)이나 최북의 죽음을 예견한 작품 같다는 생각이 든다.
큰 나뭇가지가 한쪽으로 쓸려 휘어져있고 거센 바람이 몰아치는 겨울밤이다. 지팡이를 든 나그네와 시동이 거센 눈보라를 온몸으로 맞으며 걸어가고 있다. 비쩍 마른 검둥개가 두 사람을 깔보았는지 사립문 밖에서 요란하게 짖어대고 있다. 빌어먹을 양반 세족들. 욕이라도 해주고 싶어 그런 검둥개를 강조하며 그렸을까. 산 위에는 쭈뼛쭈뻣 고사목들이 을씨년스럽기 짝이 없다. 만년의 외로움과 고독이 뼛속까지 스몄을 최북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최북은 눈보라 치는 어느 겨울 집에 가다 성곽 모퉁이에서 얼어 죽었다. 작달막하고 왜소했던 체구에 애꾸눈 호생관은 술 석 잔을 넘으면 욕지거리를 해대는 안하무인이었다. 그는 술값을 벌기 위해 그림을 그렸고 그림을 그리기 위해 술을 마셨다. 사람들은 이런 그에게 손가락질 했지만 그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최북은 북으로 숙신까지 들어가 흑삭에 이르렀고 동쪽으로는 일본에 건너가 적안까지 갔었던 최북이었다. 제멋대로 산, 자존심으로 산 세상의 자유인이었다. 그는 붓 한 자루에 인생을 걸었고 기존 통념에 정면으로 도전했다. 남아있는 한쪽 눈으로 속된 세계를 경멸했고 조롱했다. 신분제에 대한 반항과 예인으로서의 자존심을 끝까지 지켰다.
신광수는 사전에 동생 신광하는 사후에 예인 최북을 읊었다. 석북 형제가 최북과의 특별한 어떤 이유라도 있었던 걸까. 예인으로의 서로의 지음만이 아닌, 신분을 넘어선, 예술을 진정으로 사랑한, 인간으로서 서로 알아주고 이해해주는 그런 사귐은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석북과 최북의 관계를 신분을 넘어선 지란지교, 백아절현이라 말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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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신석초역,『신광수,신위』(명문당,2003),299쪽.
(2)숭문연방집, 여강록 하편, 134쪽.
(3)유재빈,「최북, 기인 화가의 탄생」,『대동문화연구 제109집』,2020,43쪽.
(4) 위의 논문 46쪽. 이현환, 蟾窩雜著, 「崔北畵說」. 원문과 번역은 국립전주박물관, 호생관 최북, 167쪽 참조.
(5)강경훈,「석북의 문학과 안산 15학사」,『석북신광수의 삶과 문학세계』(2006,학술발표대회) 참조
(6) 안대회,『조선의 프로페셔널』(휴머니스트,2007),21-57쪽 참조.
(7) 『숭문연방집』,한국한문학연구회(탐구당,1975),533쪽.
「崔北歌」. 이 글이 실려 있는 <진택선생문집> 제7권은 1784년에서 1787년 사이의 시들을 모은 것이다. 문집에 글이 시간 순서대로 실려 있음을 비추어 볼 때, 이 글은 대략 1786년경에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 글이 최북이 죽은 직후 애도하며 지었다는 것을 근거로 유홍준은 최북의 몰년을 1786년으로 보았다. 유홍준, 「조선후기 문인들의 서화비평」, <19세기 문인들의 서화>, 열화당, 1988, 64쪽. 유재빈, 「최북,기인 화가의 탄생」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