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에서 온 편지
독일에서 온 편지
  • 뉴스서천
  • 승인 2002.04.18 00:00
  • 호수 12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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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독일에서 언어치료학을 공부하고 있는 친구와 전자메일을 주고받는다.
메일은 날씨, 학업, 친구 이야기 등 일상에서 우러나오는 감정의 표현들이 주를 이루고 있다. 독일에서 생활하기에 느낄 수 있는 문화적 자유로움과 동양적 사고와의 차이에서 느끼곤 하는 외로움이 담겨진 내용들이었다.
며칠 전에 받은 메일도 거의 비슷한 내용이었다. 메일에는 월드컵을 앞두고 우리나라 축구 국가대표팀이 독일에서 터키 대표팀과 평가전을 했는데 그 경기를 관전하고 느낀 소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90분간 열심히 뛴 선수들에게서 느껴지던 아름다움, 그리고 ‘붉은 악마’ 응원단과 함께 응원을 하며 생동하는 젊음과 살아있다는 흥분을 느낄 수 있었다는 아주 평범한 내용이 대부분이었다. 그렇지만 마지막에 적혀 있는 글귀는 그냥 지나칠 수 없을 정도로 사뭇 달랐다. 그 글은 내게 색다른 감정을 불러일으켰으며 좀처럼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을 기쁨으로 자리잡기에도 충분했다.
축구 경기를 보며 그 친구의 눈을 사로잡은 것은 그라운드를 누비며 달리고 있는 황선홍, 최용수, 차두리 선수도 아니었다고 한다. 대신 그 공간을 가득 채운 것은 그라운드를 누비고 있는 주전 선수들을 벤치에서 말없이 바라보고 있던 후보선수들이었다고 한다. 감독님이 자신을 불러 저 넓은 그라운드에 설 기회를 주시겠거니 생각하며 언젠가는 올지도 모를 기회를 준비하고 있던 후보선수들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기회가 왔다면 좋았을 텐데 그대로 경기 종료 휘슬이 불려 고개를 떨군 채 가방을 들고 그 곳을 벗어나던 안타까운 모습이 좀처럼 뇌리에서 잊혀지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그 친구의 메일을 읽고 오랫동안 생각에 잠기고 말았다. 우리는 과연 주인공만을 보고 있었지 않았나 하고 말이다. 주연이 있으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주연을 더욱 빛나게 하는 조연이 있다는 것을 잊지는 않았을까? 이 사회가 유지되고 있는 것은 남 모르는 곳에서 각자 맡은 일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는 땀방울이 있기 때문일텐데 당장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고 그들을 잊지는 않았는지 말이다.
사소하다고 생각한 일들이었다. 매일처럼 돌아가고 있는 세계이기에 느끼지 못했던 일들이었다. 그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위해 땀을 흘리고, 몸을 던지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부분은 그 중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빙산의 일각일 뿐이다. 승부 세계의 냉정함이라 해도 그들이 승자는 못될망정 패자는 아닐진대 그들을 위한 공간은 주어지지 않는다.
며칠 전, 우리 대학 근처 건물에서 화재가 나 검은 연기가 하늘을 뒤덮은 적이 있었는데 그 때 소방관들이 와 불을 끄는 모습을 본 적이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면서 그들이 가장 아름다운 분들이라고 생각했었다. 자신이 단지 소방관이라는 한 가지 이유만으로 화마(火魔) 속에 몸을 내던지는 모습은 순교자의 모습과도 같아 보였다. 하지만 평상시 어느 누가 그들의 모습을 떠올리며 고마움을 느끼고 있을까?
벤치에 앉아 주전들의 몸놀림을 지켜보고 있던 그들. 지금은 비록 화려한 조명을 받지는 못하지만 좀 더 넓은 차원에서 그들의 땀방울도 가치 있게 새겼으면 싶었다는 친구의 말 역시 그런 뜻을 내포한 것이 아니었나 생각해 본다.
‘자신들에게 혹 기회가 오지 않을까 잔뜩 기대에 찬 눈빛으로 몸을 풀고 있는 모습이 자꾸만 애처로워 보였다….’는 친구의 말은 하루, 하루를 주어진 공간 안에서 자신마저 잊고 지냈던 내게 ‘나와 너, 그리고 우리’라는 개념을 다시 생각하게 하는 계기로, 모니터 화면 속 그 친구의 따뜻한 마음까지 엿볼 수 있는 시간으로 모자람이 없었다.
내게는 그것이야말로 행복한 일이었다
<양원준/대전한밭대 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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