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동주 시인의 시에 ‘순이’라는 이름을 가진 여자가 몇 차례 등장한다. 「소년」이라는 시에서 윤동주는 “강물 속에는 사랑처럼 슬픈 얼굴― 아름다운 순이의 얼굴이 어린다”라고 했다. 윤동주의 마음에 들어와 있던 ‘순이’가 과연 누구였을까 하는 의문을 품고 실제 인물을 추적한 이들이 여럿 있었다. 하지만 ‘순이’의 모델이 누군지 몰라도 윤동주의 시를 이해하는 데는 별다른 어려움이 없다.
국어사전에 실린 낱말 중 ‘순이’를 독립된 이름이 아니라 접미사처럼 뒤에 붙여서 특정한 성향을 지닌 여자를 지칭하는 용법으로 사용한 것들이 있다. 공장에서 일하는 여자를 가리키는 ‘공순이’, 구두쇠처럼 매우 인색한 여자를 가리키는 ‘짠순이’가 표준국어대사전에 표제어로 올라 있다. 이와 함께 고려대한국어대사전에는 억척스러운 여자를 일컫는 ‘억순이’와 연예인이나 운동선수 등을 추종하는 여자를 일컫는 ‘빠순이’가 실려 있다. 이 밖에도 국립국어원이 시민과 함께 만드는 국어사전을 표방한 <우리말샘>에는 ‘집순이’, ‘밥순이’, ‘식순이’, ‘가방순이’ 같은 말도 올려놓았다. ‘가방순이’의 풀이는 ‘결혼식 날 신부의 가방을 들고 신부 도우미 역할을 하는 사람.’이라고 되어 있다. 이 말들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대체로 낮잡아 이르는 호칭임을 알 수 있다. 예전에 영순이나 정순이처럼 뒤에 ‘순이’가 붙은 여자 이름이 많다 보니 생긴 현상일 텐데, 여성 입장에서는 불쾌하게 여길 만한 낱말들이다.
그런 ’순이’들 중에서 그나마 괜찮은 호칭 하나가 국어사전에 보인다.
또순이: 똑똑하여 일을 야무지게 처리하는 여자를 귀엽게 이르는 말.
표준국어대사전의 풀이인데, 고려대한국어대사전은 ‘똑똑하고 돈을 매우 아껴 쓰는 여자를 귀엽게 이르는 말.’이라고 풀이했다. 많은 이들에게 ‘또순이’보다는 ‘똑순이’가 더 귀에 익은 호칭으로 다가올 듯하다. 하지만 ‘똑순이’는 국어사전 편찬자의 부름을 받지 못했다. 똑순이가 사람들 귀에 친근하게 다가가게 된 건 1980~1981년에 방송되어 인기를 끌었던 TV드라마 <달동네>에 ‘똑순이’로 나온 여자아이 때문이다. 성인 연기자들보다 똑순이 역을 맡은 아역 배우 김민희가 인기가 많을 정도여서 지금도 기억하는 이들이 많다.
그렇다면 또순이는 어떨까? 똑순이는 ‘똑’ 자 때문에 ‘똑똑하다’ 혹은 ‘똑 부러지다’와 같은 말을 연상시키는데, 또순이의 ‘또’는 그런 어감과 거리가 있음에도 똑똑하다는 뜻을 담아 풀이했다. 네이버뉴스라이브러리를 통해 옛 신문을 살펴보면 1921년 4월 1일 조선일보에 격공생(擊空生)이라는 이름으로 발표된 소설 「발전」에 ‘또순이’라는 이름이 처음으로 보인다. 거기에 첫째딸은 순이, 둘째딸은 끗순이, 셋째딸은 또순이라고 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그 후에 나오는 기사들에서도 또순이라는 이름이 더러 보이는데, 그 옆에 한자로 차순(且順)이나 우순(又順)이라고 표기해 두었다. 그러므로 국어사전에 실린 ‘또순이’는 그런 이름과 관련지을 수 없다.
그러다가 1963년에 박상호 감독이 도금봉과 이대엽을 주연으로 내세운 <또순이-행복의 탄생>이라는 영화가 있었음을 알게 됐다. 영화의 주인공 ‘또순이’는 함경도 출신으로 운수업을 일으켜 성공할 정도로 억척스럽고 강인한 생활력을 가진 여성이다. 예로부터 함경도 출신은 남자 여자 가릴 것 없이 억센 성품을 지니고 있다는 평이 있었고, 그래서 억센 함경도 여성을 ‘함경도 또순이’라고 부르곤 했다. 그런 또순이를 내세운 라디오 연속극이 인기를 끌자 영화 제작까지 나아가게 된 것이다. 그런 ‘또순이’가 국어사전에 오르게 되었으니, 김민희가 연기했던 ‘똑순이’도 언젠가는 국어사전에 실리는 날이 오지 말라는 법도 없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