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서 읍내 중학교까지 가려면 들녘을 질러가야 한다. 얼마나 멀었는지 모른다. 하루에 두 번씩 오가는 등하교 길이다. 들녘 초입에 주막이 있고 들녘 끝에도 주막이 있다. 장돌뱅이가 목을 축이던 곳이다. 걸어서는 4, 50분 정도가 걸린다.
들녘의 농로 둑길에 털게(?)가 살았다. 우리들은 그 게를 둑직그이라고 불렀다. 몸집이 작은 회색빛 털게이다.
길은 언제나 촉촉하고 폭신폭신했다. 걷기가 부드러웠다. 비만 오면 진흙길로 변했다. 그런 날엔 고무신을 신고 다녔다. 고무신도 진흙이 달라 붙어 미끄러지기라도 하면 찢어질 때가 있다. 어떤 땐 맨발로 걷는 게 편했다. 둑직그이도 비 오는 날이면 일체 밖에 나오지 않는다. 5미터쯤 접근하면 햇볕을 쬐고 있던 둑직그이는 그만 휘릭 숨어버린다. 살살 다가가는데도 얼마나 시각이 밝은지 쏙 들어가선 절대로 나오지 않는다. 언제 나오는가 오래 기다린 적도 있었지만 절대로 나오지 않는다. 내가 서있는 것을 구멍 속에서 바라보고 있는 모양이다.
파장마당에는 으레 윷판이 벌어졌다. 물론 내기 윷이었다. ‘모냐’, 꾼들의 쉰 목소리와 함께 밤은 깊어갔다. 아버지는 장날이면 언제나 밤늦게 돌아왔다. 어머니와 나는 등잔초롱을 들고 들녘길로 마중 나가곤했다. 풀잎 밤이슬에 베잠방이가 젖었다. 어머니는 내게 항시 말씀하셨다.
“절대 니 아버지 닮지 마라.”
돌아오는 길은 적막했다. 어머니의 말에 아버지는 일체 말이 없다. 아버지 지게에는 며칠 분 안되는 외상 닭사료 두서너 포대뿐이었다. 그 길은 어머니에겐 가슴 아픈 들길이었다.
“신 박사, 둑직그이 알어?”
어느날 나태주 시인께서 전화가 왔다.
“예. 알죠.”
참 오랜만에 듣는 둑직그이의 정겨운 이름이었다.
글을 쓰다 생각이 나신 모양이다. 시인은 둑직그이를 기억하고 있었다. 중학교 때였으니 60년도 넘었다. 우리 고향 서천에서는 ‘게’를 ‘그이’라고 불렀다. 시인은 등하교 때 그 길을 매일 걸었다고 한다. 역시 나도 몇 년 후 시인을 따라 그 길을 걸었다.
지금은 농지 정리로 농로는 온데간데 없이 사라졌다. 둑직그이는 사라졌을까. 큰 개천 갯가에 혹여 그 후손들이나 남았을까.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상여집이 있었다. 상여집도 물론 사라졌다. 먼 전설 속의 불빛만 깜빡이고 있을 뿐이다. 한 수 되뇌인다.
새벽 하늘 은색의 빛
베틀에 걸러지면
짐승의 지친 울음
자주 감자꽃은 피어
저녁 땐 상여집 불빛
천축국서 깜빡이고
-신웅순의 「한산초ㆍ37」
2024. 4. 20 .여여재, 석야 신웅순의 서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