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은 명실공히 공부의 나라다. 공부의 나라에서 공부한다는 것은 오늘을 성실히 살겠다는 약속이다. ‘어찌 세상 일이 공부만으로 되랴’라거나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다’는 의미가 있는 부분도 있으나 그러거나 말거나 공부는 해야 한다.
증자가 쓴 대학 책을 빌어 말한다면 ‘공부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수신을 시작으로 치국에 이르는 것’이다. 그 수신을 위한 공부에 가장 기초가 되는 시간이 어려서의 공부라고들 말한다. 어려서의 공부가 그 사람의 삶의 무게인 귀貴와 천賤을 평생 좌우하는 것이다.
대부분 역사의 현자들은 어려서 공부를 많이 했음을 알 수 있다. 아성亞聖 맹자님의 경우는 그의 모친 장仉씨의 헌신적인 노력의 결과라고 말하기도 한다. 맹씨보孟氏譜에 따르면 맹자님은 나면서<맹자생유孟子生有> 성품이 맑았으며<숙질淑質>, 일찍 그 아버지를 잃었으나<숙상기부夙喪其父> 인자하신 모친으로부터<유피자모幼被慈母> 공부를 위해 세 번 이사하는 교육을 받았다.<삼천지교三遷之敎>
이보다 대략 한두 세대 앞선 시대의 공자님께서는 논어 위정편 2-4문장에서 ‘오십유오이지우학吾十有五而志于學’이라 하여 15세에 공부에 뜻을 두었다고 그의 나이 70세가 지날 무렵에 이르러 밝힌 바 있다. 혹자는 여기서 15세라 말한 것은 당시 주나라는 15세가 되면 대학에 들어가 공부하는 나이이기에 요즘으로 말하면 대학생 나이인 21-23세 나이쯤이라고 말하기도 하는데 경전을 그렇게 보면 곤란할 수 있다. 그냥 15세로 이해하는 것이 옳다. 그러므로 15세라는 나이는 매우 중요한 분수령이 되는 나이이기도 하다. 최소한 15세가 된 아들이 있는 집안이라면 공자님께서 말씀하신 ‘오십유오이지우학吾十有五而志于學’이라는 말의 의미를 정확히 이해할 필요가 있다. 쉽게 말해서 15세라는 나이는 유교의 가르침이든 불교의 가르침이든 기독교의 가르침이든 4권의 책을 읽어야 하는 나이라는 말이기도 하다.
유가 집안의 자녀라면 사서四書<논어 맹자 중용 대학>를 읽어야 할 것이고, 불교 집안의 자녀라면 네 권의 책, 곧 삼경일론三經一論<능엄경 금강경 원각경 그리고 기신론>을 읽어야 할 것이고, 기독교 집안의 자녀라면 세 권의 공관복음서와 한 권의 복음서를 합한 사복음서四福音書<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그리고 요한복음>를 읽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책들은 언제 읽어야 하는가. 그것이 바로 15세 전후의 나이에 읽어야 하는 것이다. 15세라는 나이는 공자님께서 인류의 후학들에게 공부의 기준점을 세워 놓은 나이인 것이다. 그러하기에 어려서 이러한 책들을 만나서 공부를 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행운을 만난 거다. 반대로 15세 나이가 됐음에도 이러한 책들을 알지도 못한다거나 또한 만날 기회가 있었음에도 자신이 부덕하여 읽지를 못했다면 그건 “괜찮아”가 아니라 가슴 철렁한 경우가 되어야 한다.
사실 사람살이라는 것은 공부와 공부의 연속이다. 물론 공부가 읽고 쓰고 외우는 정도에 머물러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정도의 기문지학記問之學의 수준이라면 그것도 곤란하다. 공부는 ‘과즉물탄개過則勿憚改’ 정신으로 해야 한다. 공부를 함에 있어서 나의 넘침이나 부족함을 발견하면 기탄없이 고치라는 말이다. 그렇다고 공부를 함에 남이 나를 알아주기를 바래서도 아니된다. 공자님은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아니한다 해도 서운치 않나니<인부지이불온人不知而不慍> 또한 군자 아니랴<불역군자호不亦君子乎>”라 했다.
어린 시절은 한도 끝도 없이 공부하는 나이이어야 한다. 특히 한 집안의 아들로 태어났다면 뜻을 크고 높게 하고 공부에 임해야 한다. 어려서 왕응진汪應辰에게 공부했던 여조겸은 말처럼 하루종일 공부만 한 사람으로 알려진 바 있다. 이렇게 공부한 사람이 세 사람이 더 있는데 주희朱熹와 육구연陸九淵과 호굉胡宏의 제자 장식張栻이 그다. 어려서 눈만 뜨면 공부만 했다는 사람들이다.
명말 청초의 학자 황종희黃宗羲에 따르면 주자 주희 선생께서 평생에 걸쳐 글이 막힐 때마다 물어보는 사람이 셋이 있는데 여조겸呂祖謙 육구연陸九淵 장식張栻이었다. 어려서 멈추지 않는 공부가 훗날 천하 명성을 낳게 한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