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일환의 낱말여행 / (100)염호(鹽虎)
■ 박일환의 낱말여행 / (100)염호(鹽虎)
  • 박일환 시인
  • 승인 2024.07.17 10:00
  • 호수 120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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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금으로 만든 호랑이 형상
박일환 시인
박일환 시인

소금과 눈은 가루 모양을 띠고 있으며 빛깔이 희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래서 간혹 둘을 나란히 놓고 비교하는 경우가 있긴 하지만 둘의 성질은 판이해서 자칫하면 엉뚱한 비유로 흐르기도 한다. 일단 아래 낱말을 보자.

염호(鹽虎): 소금처럼 흰 눈으로 만든 호랑이. 강건한 용맹을 상징한다.

표준국어대사전에만 나오는 낱말인데, 풀이가 왠지 어색하다. ‘눈처럼 흰 소금이라고 하면 자연스럽지만 소금처럼 흰 눈이라는 표현은 잘못된 비유라는 느낌으로 다가온다. 눈이 소금에 비해 훨씬 선명한 흰 빛을 띠기 때문이다. ()은 소금, ()는 호랑이를 뜻하는 한자이다. 낱말에 사용된 한자로만 보자면 눈을 끌어들여 풀이할 이유가 없다. 그런데 왜 뜬금없어 보이는 흰 눈을 끌어들였을까? 여기서부터 내 의문이 시작됐고, 이 낱말의 출처를 확인한 뒤 표준국어대사전의 풀이가 완전히 틀렸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염호(鹽虎)는 중국 고전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의 희공(僖公) 30년 조()에 나온다. 주나라의 왕이 신하를 노나라에 사신으로 보냈는데, 노나라 조정에서 사신을 위해 귀한 음식을 차려 놓고 맞이했다. 그러자 주나라 사신이 이렇게 말하는 대목이 나온다,

薦五味(천오미) 羞嘉穀(수가곡) 鹽虎形(염호형) 以獻其功(이헌기공)

맛있는 음식과 훌륭한 곡식 등으로 대접하는 건 그 사람의 공()을 기리기 위함이라는 뜻을 가진 구절인데. 자신은 그런 대접을 받을 만하지 않다며 사양했다고 한다. 위 구절에 나오는 鹽虎形(염호형)은 소금을 굳히거나 구워서 호랑이 형상처럼 만든 것을 뜻한다. 호랑이 모양으로 만든 건 표준국어대사전의 염호(鹽虎) 풀이에 나오는 것처럼 호랑이가 강건한 용맹을 상징하는 동물이기 때문이다.

위에 인용한 대목 앞에 형염(形鹽)이 먼저 나오며, 형염과 염호형(鹽虎形)은 같은 대상을 가리킨다. 이 형염이 조선왕조실록에 등장한다. 세종실록 130권과 131권에 나라에서 지내는 다섯 가지 의례인 오례(五禮)를 행할 때 음식을 상에 올리는 방식이 자세하게 나온다. 이때 빠지지 않고 올린 것 중의 하나가 형염(形鹽)으로, 앞서 말한 대로 호랑이 형상으로 만든 소금이다.

염호(鹽虎)는 한편으론 흰 눈을 뜻하는 용법으로 쓰이기도 한다.

북송(北宋)의 정치가였던 한기(韓琦)가 쓴 시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危石蓋深鹽虎陷(위석개심염호함) 老枝擎重玉龍寒(노지경중옥룡한)

이 구절이 유명해서 조선 시대 가사인 소상팔경가(瀟湘八景歌)에도 살짝 변형된 형태로 삽입되어 있으니, ‘위곡(委曲)한 늙은 가지 옥룡(玉龍)이 서리었고, 기괴한 성낸 바위 염호(鹽虎) 엎쳤는 듯, 강산이 변화하여 은세계(銀世界)를 이뤘으니라는 대목이다. 이때의 염호(鹽虎)는 기괴한 바위에 눈이 덮여 마치 호랑이처럼 보인다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이로부터 염호(鹽虎)와 옥룡(玉龍)이 흰 눈을 비유하는 시적인 표현으로 자주 사용되기 시작했다. 표준국어대사전이 염호(鹽虎) 풀이에 눈을 등장시킨 이유를 비로소 짐작할 만했다. 문제는 그조차도 엉뚱한 방향으로 끌고 감으로써 전혀 동이 닿지 않는 풀이로 만들었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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