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특집 / 월남 이상재와 우당 이회영
■ 특집 / 월남 이상재와 우당 이회영
  • 허정균 기자
  • 승인 2024.10.23 23:05
  • 호수 121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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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당 이회영은 월남 이상재 선생의 평생 동지

신민회 활동·헤이그 만국평화회의 특사 파견 주도
▲월남 이상재
▲월남 이상재
▲우당 이회영
▲우당 이회영

월남 이상재는 만민공동회를 통해 입헌군주제를 실현코자 했으며, 신민회에 참여하여 민주공화정을 논의했다. 이는 상해 임시정부가 선포한 민주공화제의 밑거름이 되었다. 그는 이회영, 이상설과 함께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를 파견을 준비하고 이를 실행에 옮겼으며, 이회영과 함께 주도했던 고종황제 망명 기도 사건은 일제의 고종 독살로 이어져 3.1운동을 촉발시켰다. 그는 죽음을 앞두고서도 좌우합작의 신간회 초대 회장으로서 일제의 압제를 끝장내려 했던 영원한 혁명가로 우당 이회영은 그의 평생 동지였다. 월남 이상재 선생 탄신 174주년을 맞아 오는 25일 오후2시부터 월남 선생 생가지에서 '월남 이상재 선생 기념사업회'의 주최와 주관으로 월남문화제가 열릴 예정이다. 이에 월남 선생과 우당 이회영의 활동을 조명하는 글을 2회에 걸쳐 연재한다.<뉴스서천>
 

신민회의 활동

신민회(新民會)1907년에 결성된 항일 비밀결사단체이다. 민중계몽·국권회복·실력양성을 목표로 했으며 회장은 윤치호, 부회장은 안창호였으며 이상재와 이회영을 비롯한 많은 애국지사들이 참여했으며 이들 가운데 이상재는 최연장자였다. 개혁당 사건으로 옥고를 치른 이상재는 옥중에서 기독교인이 되고 출옥 후 상동교회 부설 상동청년학교에서 우국지사들과 함께 신민회를 결성하여 활동했다.

신민회의 산실 상동교회

▲초기 상동교회 모습
▲초기 상동교회 모습

상동교회는 18855월 서울에 도착한 미국인 선교사 스크랜턴(william B. Scranton)이 세운 교회이다. 그는 1886년 정동병원을 설립하고 병원 선교를 시작했는데 1887년 남대문 근처 상동으로 병원을 옮기고 1893년 상동교회를 설립하여 초대 담임목사에 취임했다. 1896년 독립협회 회원이었던 숯장수 출신의 전덕기가 이 교회의 전도사가 되어 상동교회에서 근무했는데 그는 1904년 상동청년학원을 개설해 민족운동의 중심지로 끌어갔다.

이 무렵 이상재와 이회영은 상동교회에서 전덕기를 비롯 김구, 이동녕, 이동휘, 신채호, 박용만 등을 비롯 많은 애국적 지식인들과 우국지사들을 만났다. 상동청년학원은 하와이 사탕수수밭 노동자로 이민간 인부들과 국내 광산노동자들이 푼푼이 모아 보낸 돈과 국내의 가난한 이웃들이 모은 돈 700원으로 설립 유지되었다 한다.

명망 있는 외부 인사와 교회 내의 유능한 청년들이 교사 일을 맡아 학생들을 가르쳤는데 이승만은 지금의 중학교 과정의 이 학교에서 성경, 영어, 산술, 지지(지리), 국문, 역사 등의 과정을 가르쳤고 성경은 전덕기, 국어학 주시경, 영어 남궁억, 세계사 헐버트, 국사 장도빈과 최남선, 수학 유일선, 체육 김창환, 교련 이필주, 한문 조성환 등이었다. 모두 대학 강사로서도 손색이 없을 뿐 아니라 애국지사였다. 교사들은 모두 무보수로 봉사했다. 이후 상동교회는 을사늑약 무효투쟁(1905)의 중심이 되었으며 신민회 결성의 산실이 되었다.

상동교회가 민족운동의 중심으로 떠오르자 1906년 초 일제 통감부는 스크랜튼을 압박했다. 이에 굴복한 스크랜튼은 자신이 관할하는 모든 교회의 청년회가 교회의 목적에서 벗어나 정치조직으로 변질되었다면서 청년회를 해산했다. 선교에 유리하다며 친일 성향으로 선회한 것이다.

그러나 상동청년학원은 살아있었다. 1907년 전덕기는 상동청년학원을 4년제로 늘렸다, 수많은 청년들이 모여들고 애국인사들은 교사로 참여했다. 원장에 전덕기, 학감 이회영, 국어 주시경. 역사 최남선 등이 맡았다. 이후 상동교회는 을사늑약 무효투쟁의 중심이 되었으며 제2차 헤이그평화회의 특사 파견과 신민회 결성의 산실이 되었다.

임시정부 수립의 밑거름 신민회

1905년 을사늑약 이후 상동청년학원을 중심으로 애국지사들이 교육, 계몽운동을 추진하면서 한편으로 신민회라는 조직을 탄생시켰다. 19074월 초에 안창호의 발기에 의하여, 양기탁을 총감독으로 양기탁ㆍ전덕기ㆍ이동휘ㆍ이동녕ㆍ이갑ㆍ유동열ㆍ안창호 등이 창건 위원이 되고 이상재, 이회영, 최광옥ㆍ노백린ㆍ이승훈ㆍ안태국ㆍ이상재ㆍ윤치호ㆍ조성환ㆍ김구ㆍ박은식ㆍ신채호ㆍ이강ㆍ임천정ㆍ이종호ㆍ주진호 등이 중심이 되어 비밀 결사 신민회가 창립됐다.

신민회의 회원은 전국에 걸쳐 약 800명에 달하였으며 당시 전국 각지의 애국 인사의 정예는 모두 망라되어 있었다.

신민회는 국권을 회복하여 자유독립국을 세우고 그 정체(政體)를 공화정으로 한다고 하여, 이전의 주장인 입헌군주제를 탈피했다는 점이 가장 큰 특징이었다. 또한 국권 회복을 위한 실력의 양성을 주장했고, 실력의 양성을 위해 민이 새로워져야 한다는 신민(新民)’을 주창했다.

신민회는 1911년 일제가 조작한 105인사건 을 계기로 조직이 드러나고 국내에 남아 있던 세력이 탄압을 받으면서 무너졌다. 신민회는 신채호가 비판하였듯이 비밀결사이면서도 스스로 비합법적인 반일활동을 회칙으로 부정함으로써 한말 계몽운동의 일반적 한계였던 합법주의와 문화주의를 벗어나지 못했다는 맹점도 있지만, 국권을 빼앗긴 1910년을 전후하여 독립군기지 건설과 무장독립전쟁으로 운동노선을 전환함으로써 이후 만주와 중국에서 일어난 독립군전쟁과 상해 임시정부 수립의 밑거름이 되었다.


만국평화회의 특사 파견

▲고종황제의 신임장(헤이그 이준열사 기념관 전시)

1899년과 1907년 네덜란드의 행정 수도 헤이그에서 두 차례의 국제회의가 열렸다. 회의의 명칭은 1차 헤이그 평화회의 1899(The First Hague Peace Conference, 1899)’2차 헤이그 평화회의 1907(The Second Hague Peace Conference, 1899)’였다. 당시 국제회의는 양자간 회의였거나 유럽 역내 국가들의 회의였지만 최초로 남미 국가나 아시아 국가들도 참여한 전 세계적인 회의였기 때문에 만국평화회의로 이름 붙여진 것으로 생각된다.

1907615일부터 1018일까지 약 4개월간 헤이그에서 열린 제2차 만국평화회의에 대한제국은 특사를 보내 세계 각국에 일제 침략의 부당성을 호소해 빼앗긴 국권을 회복하려 했으나 일본의 방해와 열강들의 냉대로 우리 대표들은 회의장에 입장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러나 특사들은 혁혁한 외교활동을 통해 한국의 실정을 널리 알렸을 뿐만 아니라 국내외 항일운동의 기폭제가 되었다.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를 파견하기 위해 이를 준비한 사람은 이상재와 이회영, 이상설 등이었다.

2차 헤이그평화회의에 초대받은 대한제국

1899년에 열린 제1차 헤이그평화회의에 초대된 나라는 모두 26개국이었다. 당시에 57개의 주권국가가 있었다 하는데 제국주의 열강의 이해 관계로 남미의 국가들이 모두 초청 대상에서 제외된 사실상 유럽회의였다. 아시아에서는 청나라와 일본, 태국이 초대됐을 뿐이었다. 대한제국이 초대받지 못한 것은 주최국이었던 러시아가 아관파천 이후 친러 정권의 대한제국을 자신의 몫으로 생각했기 때문이었던 것으로 판단된다.그러나 러일전쟁에서 러시아가 패한 직후에 열린 제2차 헤이그평화회의에서는 상황이 달라졌다. 주최국인 러시아는 당연히 대한제국을 초청해 일본을 견제하려 했을 것이다.

190595일 미국 루즈벨트 대통령의 중재로 포츠머스 강화조약이 맺어지며 러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종결됐다. 이 일로 루즈벨트는 1906년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이에 앞서 미국은 19057월 을사늑약의 모태인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맺어 일본의 조선 지배를 승인했다.

1905913일 워싱턴 주재 러시아 대사는 자국 황제 니꼴라이 2세의 훈령을 받고 이제 전쟁이 끝났으므로 지금이 제2차 평화회의를 개최할 적기라는 내용의 외교각서를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보냈다. 이에 미국 정부는 “1차 회의의 미진한 부분을 계속 토의하기 위해 러시아가 회의를 주도할 필요가 있으며, 러일전쟁에서 드러난 문제들을 토의하기 위해서도 전쟁 당사자였던 러시아가 2차 회의도 주도할 필요가 있다고 밝혀 회의 개최권을 러시아에게 양보했다.

1905925일 러시아는 제2차 헤이그평화회의를 위한 초청 서한을 47개 초청국에 보냈다. 초청은 러시아가 주재하는 나라의 러시아 외교관이 주재국 외무장관 앞으로 전달했으며 그 초청 명단에 한국도 포함돼 있다.

1904210일 러시아에 대한 일본의 선전포고가 이루어지자 212일 러시아 공사 파블로비치는 자국의 공사관 관리 등을 프랑스 공사에게 위탁하여 업무를 대리케 하는 한편 철수를 개시해 216일자로 인천을 통해 빠져나갔다. 당시 일본의 압력에 따라 양국의 공관 철수는 물론 조약관계를 폐기한다는 대한제국 정부의 선언이 있었으므로 대한제국과 러시아는 곧장 외교관계 단절상태에 들어갔다.

이 해 3월 한·일간의 의정서 체결에 의해 한국은 강제로 일본의 동맹국이 되었고, 러시아의 적국(敵國)이 되었다. 또한 19043월부터 일본은 한국과 러시아 사이에 체결된 ·러조약을 폐기시키는 동시에 러시아 주재 한국 공사관도 폐쇄하고 이범진(李範晋) 공사를 비롯해 공사관원을 철수시키도록 요구했다.

러시아 뼤쪠르부르그에 주재한 이범진 공사에게 190434일 철수 명령이 내려졌으나, 고종은 프랑스 외교채널을 통해 철수 명령이 일본의 압력에 의한 강제적인 것이었으므로 따라서 철수하지 말라고 밀명을 내렸다.

더구나 러시아가 헤이그평화회의 초청장을 보냈던 9월은 대한제국이 일제에 외교권을 빼앗긴 19051127일 이전이었으므로 대한제국 정부는 어떤 경로를 통해서든 제2차 헤이그평화회의 초청장을 받았던 것이다.

헤이그 특사 파견 산파이상재와 이회영

“1904년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이기자 특사로 출옥, 1905년 의정부 참찬에 임명되어 헤이그 만국평화회의 밀사 파견 준비차 내밀히 한규설·이상설의 집을 왕래하던 중 통감부에 체포되었으나, 증거불충분으로 2개월 후 석방되었다.”

이는 국가보훈처 공식 블로그에 실린 월남 이상재에 대한 기록이다. 을사늑약 직후 고종 황제의 간곡한 부름에 월남은 1907년 군대 해산이 있을 때까지 의정부 참찬직에 있었다.

한규설(韓圭卨, 1856~1930)은 무과에 급제한 이후 장위사·의정부 찬성 등을 거쳐 1905년에 의정부 참정을 역임한 조선 말기의 무신이자 정치가이다. 190511월 일본의 전권 대사인 이토 히로부미가 대한제국의 여러 대신들에게 을사조약 체결에 대해 의견을 물었을 때 한규설은 이를 끝까지 반대했다.

이상설(李相卨 1870~1917)1894년 조선왕조 마지막 과거인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1896년 성균관 교수가 되고, 탁지부 재무관에 임명되었다. 이 무렵 미국인 선교사 헐버트와 친교를 맺고 신학문을 공부했으며 영어와 프랑스어를 익혔다. 또한 이회영·이시영 등과 외국 서적을 들여다 만국공법(萬國公法) 등 법률을 번역·연구하기도 했다. 의정부 참찬직에 재직하며 을사조약 체결 결사반대와 오적의 처단을 주장하는 상소를 올렸으며 이후 관복을 벗고 국권회복운동에 앞장섰다. 민영환의 순국 소식을 듣고 종로에서 민족항쟁을 촉구하는 연설을 한 다음 자결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우당 이회영 약전>에는 선생의 친척인 이상설은 이러한 자유·평등의 혁명적인 면에서 선생과 친근하게 되었고 지기(志氣)가 서로 들어맞아 생사를 함께 하는 동지가 되었다.”고 쓰고 있다.

1906년 봄 이상설은 이동녕·정순만 등과 조국을 떠나 상하이와 블라디보스토크를 거쳐 러시아령 연추(煙秋)로 가서 이범윤(李範允)과 국권회복 운동의 방략을 협의한 후 이해 8월 북간도 용정으로 갔다. 이곳에서 항일민족교육의 요람인 서전서숙(瑞甸書塾)을 건립하고 숙장(塾長)이 되어 이동녕 등과 함께 역사·지리·수학·국제법·정치학 등의 신학문과 민족교육을 실시했다.

이같은 이상설 일행의 해외 망명을 역사학계 일부에서도 앞으로 있을 헤이그 평화회의에 참석을 위한 사전 준비로 보고 있다. 서명이 없는 조약이 무효임을 국제사회에 널리 알려 국권 회복의 단서를 마련하고자 했던 것이다.
<우당 이회영 약전>에는 만국평화회의 특사 파견 계획을 실천하기 위한 이회영의 활동을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선생은 당신의 계획을 동지들에게조차 알리지 못하고 혼자서 그 실행을 위해 바삐 움직였다. 고종황제께 이러한 계획을 아뢰어 건의하고 대표의 임명과 신임장을 받는 등 모든 일이 궁중 안팎에 겹겹으로 쳐져 있는 왜적의 감시와 경계의 그물을 뚫고 이루어져야 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중간에서 연락하고 교섭할 인물을 엄선했는데 대한협회 이후 선생과 가까와져 믿고 지내는 내시 안호형을 택하여서 선생의 계획을 황제께 아뢰게 하였다. 고종황제의 윤허가 내리고 파견할 수석대표에 대해서도 주청한 대로 이상설이 임명되었다.”

이준, 고종 신임장과 함께 헤이그로

2차 헤이그평화회의 주최국인 러시아로부터 초청국 명단을 넘겨받은 네덜란드는 190749일자로 1907615일 회의 개최를 통보하는 서한을 초청국에 보냈다. 그런데 여기에서 한국은 제외되었다.

부사인 이준(1859~1907)은 함경도 북청 출신으로 1887년 북청에서 초시에 합격했으며, 1895년 법관양성소를 졸업하고 1896년 한성재판소 검사보가 되었다.

1898년 독립협회에 가입해 11월의 만민공동회에서 가두연설을 하는 등 적극적으로 활동했으며 1902년 이상재·민영환·이상설·이동휘·양기탁 등과 비밀결사인 개혁당 운동에 참여했다.

190511월 일제가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하고 국권을 박탈하자, 상동교회에 모인 전덕기·최재학·정순만·이동녕 등과 함께 을사조약 폐기 상소운동을 벌였으며 대한문(大漢門) 앞과 서울 시내에서 일본 경찰과 투석전을 벌이며 격렬한 시위운동을 벌였다.

이위종(1887~ ?)은 이범진의 아들로 외국공관장인 아버지를 따라 미국·영국·프랑스·러시아 등을 순회하여 외국어에 능통했다. 아버지가 주러시아 공사가 되자 뼤쪠르부르그 주재 한국공사관 참서관(參書官)이 되었다. 1905년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이 박탈되어 각국 주재 한국공사관이 폐쇄되고, 일본 정부가 소환령을 내렸으나 이에 응하지 않고 아버지와 함께 뼤쪠르부르그에 머물며 외교활동을 계속하던 중 약관의 나이인 스물에 특사 일행에 합류했다.

문제는 고종의 신임장이었다. 일제의 감시를 뚫고 이를 손에 넣는 데에는 전덕기 처의 이종 언니인 김상궁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 한다. 고종 황제의 신임장 번역문은 다음과 같다

대한제국 특파위원 전 의정부 참찬 이상설, 전 평리원 검사 이준, 전 러시아 공사관 이위종에게 주는 신임장대황제는 칙서를 내려 가로되 우리나라의 자주독립은 세계 여러 나라가 공인하는 바라, 짐이 지난번 여러 나라로부터 조약을 맺고자 하여 서로 우방으로서 긴밀함을 갖은즉, 이제 세계 여러 나라가 평화를 위하여 한 자리에 모이기에 응당 참여함이 마땅한 것인데 19051117일에 있어서 일본이 아국에 대하여 나라 사이의 법을 어기고 도리에 어긋난 협박으로 우리의 외교권을 빼앗아 우리 우방과의 외교를 단절케 했다. 일본의 모욕적인 침략은 이르지 않은 곳이 없을 뿐더러 그 침략적 야심은 인도에도 위배되는 것이기에 좋게 기록할 수 없다. 짐의 생각이 이에 미치니 참으로 가슴 아픔을 느끼는 바이다. 이에 종이품 전 의정부 참찬 이상설, 전 평리원 검사 이준, 전 러시아공사관 참서관 이위종을 특파하여 네덜란드 헤이그평화회의에 나가서 본국의 모든 실정을 온 세계에 알리고 우리의 외교권을 다시 찾아 여러 우방과의 외교관계를 원만하게 하도록 바라노라. 짐이 생각하건대 이번 특사들의 성품이 충실하고 강직하여 이번 일을 수행하는 데 가장 적임자인 줄 안다. 광무 11420일 한양 경성 경운궁에서 친히 서명하고 옥새를 찍노라. 대황제

▲ 특사들이 각국 대표들에게 배포한 독립호소문(이준 열사 기념관 전시)
▲ 특사들이 각국 대표들에게 배포한 독립호소문(이준 열사 기념관 전시)

이준은 고종의 신임장을 휴대하고 422일 서울을 출발해 열차편으로 부산에 도착했다. 부산에서 배를 탄 이준은 423일 부산을 출발해 426일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이상설과 합류한 특사 일행은 521일 블라디보스토크를 출발해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이용해 64일 뼤쪠르부르그에 도착했다.

뼤쪠르부르그에서 이위종과 합류한 특사 일행은 러시아 공사 이범진의 도움을 받아 러시아 황제 니꼴라이2세에게 고종의 친서를 전하고 베를린, 브뤼셀을 경유해 회의장이 있는 헤이그에 도착한 것은 회의 개회일로부터 10일이 지난 625일이었다.

▲평화회의 취재기자단과 특사들이 회견한 내용을 실은 평화회의보.(헤이그 이준 열사 기념관 전시
▲평화회의 취재기자단과 특사들이 회견한 내용을 실은 평화회의보.(헤이그 이준 열사 기념관 전시

우리 역사에서 헤이그밀사사건이라 부르고 있지만 이는 일본인들의 시각이다. 이상설, 이준, 이위종은 고종황제의 신임장을 받은 특사였으며 이들은 대한제국의 대표단이었다. 비록 회의장 참석은 하지 못했지만 이들은 장외 활동을 통해 강도 일본의 만행을 온 세계에 고발했다.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국제 정치질서 속에서 이같은 외교적 노력이 실현 가능성이 없는 무모한 일로 평가하기도 하지만, 이 사건으로 국제정치질서의 내막을 명확히 알게 되었으며 이후 본격적인 항일무장투쟁을 재촉하는 기폭제가 되었다.<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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