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려서 범하는 실수 중에 가장 큰 실수는 아마도 공부를 치열하게 하지 않는 실수일지도 모른다. 공부라는 것은 때가 있다. 가을과 겨울을 살고자 하는 농부는 무슨 일이 있어도 봄에 씨앗 뿌리고 여름에 가꾸기를 게을리하지 않는다. 비온다고 멈추는 법이 없으며 덥다고 쉬는 법도 없으며 끼니를 거를망정 논으로 밭으로 나아가 곡식 가꾸기에 온 힘을 다한다.
농부는 자신이 할 일을 다 한 연후에 농사가 잘되고 안되고는 하늘에 맡긴다. 그래서 나온 말이 돈 잘 쓰기는 부모 잘 만날 탓이요, 옷 잘 입기는 아내 잘 만날 탓이요, 밥 잘 먹기는 하늘 잘 만날 탓이라 했다.
공부라는 것도 이와 별반 다르지 않다. 인생의 봄이라는 10대 청춘을 어떻게 공부하느냐에 따라서 한 사람의 인생은 결정된다. 공자님의 경우는 15세에 공부에 뜻을 두었다고 논어 위정편2-4문장은 밝히고 있다.<오십유오이지우학吾十有五而志于學> 공자님의 대표적인 공부법을 꼽는다면 특정시간이 없이 틈틈이 공부하는 것이다.
이 말은 논어 첫 장 첫 줄에 나오는 말로 ‘학이시습지學而時習之 불역열호不亦說乎’이다. 배우고 틈나는 대로 익히니 또한 기쁘지 않은가. 공자님은 이미 15세에 천명天命을 궁구窮究하겠다며 공부로 뜻을 세우신 분이다. 그렇게 세운 뜻을 장장 50세에 이르러 지천명했다 하니 곧 비로소 하늘의 뜻을 알았다는 말이다. 15세에 공부 시작한지 30년이 훅 지나서야 깨달은 것이다.
이러한 공자님의 공부법을 훗날 공자님의 손자 자사는 중용 20장에서 이렇게 기록한다. “어떤 사람은 날 때부터 알기도 하며<혹생이지지或生而知之> 어떤 사람은 배워서 알기도 하며<혹학이지지或學而知之> 어떤 사람은 고생해본 뒤에 알기도 하나니<혹곤이지지或困而知之> 결국엔 그것을 알았다는 점에서 보면 다 같다는 말이다.<급기지지일야及其知之一也>”
이를 좀더 쉽게 풀어쓴 것이 논어 계씨편 16-9문장에 있는데 “공자님 말씀에<공자왈孔子曰> 태어나면서 아는 자는 최상이요<생이지지자상야生而知之者上也> 배워서 아는 자는 그 다음이며<학이지지자차야學而知之者次也> 고생하고서야 공부하는 자는 또 그다음이며<곤이학지우기차야困而學之又其次也> 고생하고 있는 중임에도 여전히 공부하지 않으니 이는 백성 중에 하급이니라.<곤이불학민사위하의困而不學民斯爲下矣>”
공자님에게 있어서 즐거움이 공부이고<락시학樂是學> 공부가 즐거움이다.<학시락學是樂> 하여 후학은 말한다. “천하의 즐거움이 어찌 이 공부만 하겠으며<천하지락하여차학天下之樂何如此學> 천하의 공부를 어찌 즐거움에 견주랴.<천하지학하비여락天下之學何比與樂>” 공자님이야 말로 진정한 학이지지자學而知之者이셨던 것이다.
물론 사람은 모두가 똑같을 수는 없다. ‘추국춘란각유시秋菊春蘭各有時’라하여 봄에 피는 난초도 있고 가을에 피는 국화도 있다 했으니 사람은 각자가 자신에 맞는 때가 있다는 말이다. ‘북송남죽별소처北松南竹別所處’라 했다. 북쪽의 소나무와 남쪽의 대나무는 자라는 환경과 처지가 다르다는 말이다. 쉽게 말해서 공부하고 있으면 언젠가는 때가 알아서 찾아온다는 말이다. 참으로 막연할 거 같은 말이지만 옛말에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라 했다. 사람으로 해야 할 공부 다 한 연후에 하늘의 명을 기다린다는 말이다. 논어에서는 더러 공부한 사람을 일러 군자라 하고 공부하지 않은 사람을 일러 소인이라고도 한다. 순자의 수신편에서 이렇게 기록한다. “군자는 사물을 부리지만<군자역물君子役物> 소인은 사물에게 부림을 당한다<소인역어물小人役於物>” 이 말의 원전은 맹자인데 맹자孟子 등문공藤文公상上편은 이렇게 기록한다. “군자는 마음을 수고롭게 하는 자요<군자노심君子勞心> 소인은 몸을 수고롭게 하는 자다.”<소인노력小人勞力-이 말은 좌전에도 언급되는바 노나라 양공 9년조 전傳에 같은 기록이 보인다. 정태현 역 춘추좌씨전4권 97쪽 전통문화연구회>
그렇다면 공자님은 15세라는 어린 나이에 학學에 뜻을 두고 열심히 공부한 소이는 뭘까. 춘추좌씨전 애공24년조 전傳은 이렇게 밝히고 있다. ‘유기무괴有基無壞’ 곧 기초가 제대로 서 있으면 무너지는 일은 없다. 곧 어려서의 공부는 기본에 충실하라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