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하는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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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뉴스서천 기자
  • 승인 2004.06.07 00:00
  • 호수 22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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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백일장 대상수상작품
   
▲ 서천중학교 2학년3반 윤 민 헌
우리 할아버지께서는 멀리 충주에 사신다. 서천에서 충주까지 가는 시간은 자그마치 4시간, 그것도 쉬지 않고 갔을 때의 일이다.

물론 중간에 쉬기도 하고 물건도 사면 시간ㅌ이 더 많이 걸리는 것은 뻔한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요즘 들어 할아버지께서 많이 편찮으셔도 이곳 서천에서 사는 우리 가족은 할아버지 댁에 자주 가지 못한다.

나의 아버지께서는 그런 사실을 자주 아쉬워하신다. 나 또한 할아버지 댁에 갈 때면 우리 집이 할아버지 댁과 조금이라도 가까이 있었으면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오늘 어머니께서 맛있는 빵을 사오셨다. 그 빵은 할아버지께서 무척 좋아하시는 빵이었다. 갑자기 올 4월에 있었던 할아버지 여든 한 번째 생신 잔치 때가 기억났다.

4월 24일 우리 가족은 내가 학교에서 돌아오자마자 점심을 먹고 바로 출발을 하였다.
그리고 공주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는 누나를 데리고 함께 충주로 향했다. 다행히 부지런히 서둘렀기 때문에 우리 가족은 7시 정도에 할아버지 댁에 도착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우리 가족이 언제 올까 하시면서 언제나 그러셨듯이 제법 쌀쌀했던 날씨에도 불구하고 우리 가족이 오는 것을 기다리고 계셨다. 나는 순간 눈물이 핑 돌았다. 아버지께서도 그러셨으리라 나는 생각했다.

그때도 할아버지, 할머니께서는 우리 가족을 따뜻하게 맞아주셨고 우리 가족은 더 따뜻하게 인사를 했다. 그 날 저녁 누나와 나는 굳은살이 생겨 아주 힘없이 말라버린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손발을 이 세상 어떤 안마기보다도 시원하게, 그리고 따뜻한 마음으로 주물러 드렸다.

무척 힘들었지만 이렇게라도 해서 할아버지 할머니의 피로가 풀어지신다면, 누나와 나는 밤을 새서라도 해드리고 싶었다. 왜냐하면 할아버지 할머니는 그 손발이 다 닳도록 거친 농사일을 하시며 아버지와 아버지의 형제들을 기르셨기 때문이었다.

옆에서 보고 계시던 아버지 어머니께서 흐뭇해하시는 모습을 보고 더 힘이 났다. 그렇게 해서 그 날 저녁에 남아 있던 추위가 다 날아가 버릴 정도의 따뜻한 하루가 지나갔다.
다음 날이 밝았다. 그 날은 훨씬 더 바빴다. 할아버지의 81번째 생신을 축하해드리려고 멀리서 친척들이 왔고, 어머니와 작은어머니, 고모님께서는 새벽 일찍부터 음식 장만에 허리를 펼 시간조차도 없었다. 누나와 나도 청소를 하고 그릇을 나르는 등 무척 바빴다.

특히 할아버지의 머리를 감겨 드릴 때는 무척 힘이 들었다. 할아버지께서는 늙으셔서 힘이 별로 남아 있지를 않다. 그래서 잘 걷지도 못하시니까 몸을 깨끗하게 하시기에 힘이 드신 것이다.
곧 음식이 준비되는 대로 그 엄청난 양의 음식들을 모두 친척 동생, 동갑인 친척 형과 이렇게 넷이서 경로당까지 날라야했다. 한두 접시는 괜찮았지만 서서히 힘이 들었다. 그래도 할아버지가 몸이 편찮으신 것까지도 잊으신 것처럼 웃으시고 경로당 할아버지들도 우리가 기특하다고 말씀하시는 것이 우리들을 즐겁게 했다. 우리도 일이 끝나고 아침을 먹었다. 그 맛이란 정말 꿀맛보다도 달았다. 우리가 먹었던 음식을 만드시느라고 애쓰신 어머니와 작은어머니 그리고 고모님께 감사드렸다.

그렇게 아침이 지나고 점심이 다가왔다. 아버지께서는 작은아버지 댁과 우리 집, 할아버지, 할머니 그리고 멀리서 온 친척들이 모두 월악산으로 놀러갔다. 할아버지 댁에 오면 거의 매번 갔던 월악산이지만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같이 갔던 것은 아마 이때가 처음이었을 것이다. 거동이 불편한 할아버지의 답답함을 풀어드리기 위해서였다. 할아버지 때문에 산에 오르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모두 즐겁고 재미있는 표정이었다. 난 분위기 메이커로서 내 일을 톡톡히 해냈다.
7시 정도가 되어서 우리 일행은 모두 돌아왔다. 친척들은 오는 길에 헤어졌는데 자주 만날 수 없기에 아쉬운 마음이 더 컸다.

집에 와서 저녁밥을 먹고 우리 가족은 다시 짐을 싸기 시작했다. 아쉽지만 다시 서천으로 돌아와야 할 시간이 된 것이었다. 할아버지, 할머니께서는 내심 아쉬워하시는 눈치였다. 그도 그럴만한 것이 누나는 학교 기숙사 생활을 하기 때문에 할아버지 댁에 가지 못했었고, 나도 1학년 겨울방학 때 가고 한동안 안 갔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우리는 학교에 다녀야 하기 때문이다. 아버지도 아쉽기는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우리 가족은 할아버지, 할머니께 다음에 다시 오겠다고 인사를 드리고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물론 누나는 돌아오다 과학고 기숙사로 돌아갔다. 우리 가족이 집에 도착한 것은 1시 정도였다. 그땐 나도 부모님도 모두 녹초가 되어있었지만, 할아버지와 할머니께서 기뻐하신 생각을 하니 그다지 힘들지는 않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좀 힘들었지만, 그래도 할아버지 댁에 오랜만에 갔다 온 것을 잘했다고 생각한다. 우리 집은 할아버지 댁과 멀지만, 멀면 멀수록 그리움이 더하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만날 때마다 더 따뜻하고 훈훈한 정이 느껴지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떨어져 있지만 우리의 마음은 할아버지 할머니와 늘 함께 한다.

지금도 어쩌면 할아버지와 할머니께서는 우리 가족이 언제 다시 오나 기다리고 계실지도 모른다. 할아버지 댁에 자주 전화를 드려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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