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벽당12곡」, 예인들의 고단한 삶 사실적인 필치로 노래
석북 신광수는 조선 후기의 대문호로 서천 출신입니다. 그의 후손 석야 신웅순 작가가 당시 예능인들의 삶을 그린 석북의 시문을 소개하는 글을 보내왔습니다.<편집자>
17·18세기 서울의 여항과 시정은 매우 활기를 띠었다. 이것은 대동법의 실시 이후 상품화폐경제의 발달 및 상공업의 발전이 가져온 서울의 도시적인 성장 때문에 가능했다. 당시 여항시인과 여항화가, 가객과 약사, 그리고 이야기꾼 등 각양각색의 예능인들이 활동하고 있었다. 이들 예능인은 자기의 재능으로 관에 매이기도 하고 혹은 자유롭게 그것을 팔아서 살아가기도 하고, 혹은 그냥 취미로 즐기는 등 양상이 구구했지만, 지향하는 큰 방향은 ‘예속으로부터의 독립’, ‘예술적 개성의 추구였다. 말하자면 장인으로부터 예술가로 발돋움하는 단계였다.1)
다음은 신광수의 「연희아이가 줄타기하는 것을 보다. 관창동주삭(觀倡童走索)」이다.
연화검무 소동이 붉은 옷을 입고서 蓮花劍舞小紅衣
칠보 묘기 빙 돌아서 줄 위를 나네 七寶盤施索上飛
몸을 날려 평지에 훌쩍 내림 보나니 忽看平地飜身落
요지에서 잔치하고 돌아온 것 같아라 疑自瑤池罷宴歸
-신광수의 「연희아이가 줄타기하는 것을 보다. 관창동주삭(觀倡童走索)」
경오년(1750) 39세 때 지은 시이다. 진사시에 급제, 한경(漢京)과 시골에서 친구들과 유가, 수창하던 시절이다.
조선 후기는 국가의 공식 행사가 위축됨에 따라 민간을 떠돌면서 연희를 공연하며 생계를 유지하는 유랑 예인 집단들이 많았다. 이들 가운데 사당패, 남사당패, 솟대쟁이패, 광대패, 걸립패가 마을, 장터, 파시를 떠돌아다니면서 여러 연희 가운데 하나인 줄타기를 공연했다.2)
줄타기는 줄 위에서 여러 가지 줄광대, 어릿광대, 삼현육각재비 등 기예, 재담, 가요를 연행하는 고난도의 전통연희이다.
검무가 끝나고 놀이판이 무르익자 줄타기, 칠보묘기가 시작되었다. 소동은 줄타기뿐만 아닌, 연화검무 등 재인이 갖추어야 할 일반적인 기예를 익혔던 것으로 보인다.5)
붉은 옷 소동이 빙 돌아 공중으로 휙 몸을 날려 사뿐 평지에 내린다. 요지에서 막 잔치를 파하고 돌아온 것 같다고 했다. 아슬아슬 칠보 줄타기의 묘기 장면이다. 이를 시화했다. 요지는 신선들이 산다는 중국 곤륜산에 있는 전설의 못이다. 주나라 목왕이 서왕모와 만났다는 곳이기도 하다.
재인의 줄타기는 주로 한강 이북 지역인 황해도와 평안도의 재인촌에 살면서 관아의 악사청에 속해 있던 재인들이 연행했다.
「연광정증검무기추강월(練光亭贈劍舞妓秋江月)」은 석북이 연광정에서 검무를 추던 추강월에게 준 시이다. 연광정은 대동강 가에 있는 누각이다. 석북은 49, 50세 때 관서 여행, 패강 유람을 했다. 이 때 쓴 시가 아닌가 생각된다.
검무4)는 전립, 전복, 전대의 복식을 한 4명의 무원들이 긴 칼을 들고 대무하여 추는 춤이다. 원래 민간에서 가면무로 행해지던 것을 조선 순조 때 궁중정재로 채택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파란 털 전립에다 자주빛 비단치마 靑鬉戰笠紫羅裳
서관에서 제일 가는 칼춤 추는 아가씨 第一西關劍舞郞
지는 해에 나루터 끝 어룡은 다가오고 落日魚龍來極浦
갠 하늘 비바람이 빈 다락에 몰아쳐라 晴天風雨集虛堂
고운 눈썹 돌아보면 생기가 돋아나고 蛾眉顧眄能生氣
붉은 소매 너울너울 돌고 모여 애끊누나 珠袖翻回合斷腸
그림배에 다시 내려 노랫가락 한 곡조 更下蘭舟歌一曲
물빛 산빛 모두 다 아득히 푸르러라 水光山色遠蒼蒼
- 신광수의 「연광정증검무기추강월(練光亭贈劍舞妓秋江月)」
수련(1~2구)에서는 검무기 추강월의 등장을, 함련(3~4구)에서는 시간적 배경과 경광을, 경련(5~6구)에서는 춤추는 모습을, 결련(7~8구)에서는 검무 춤 후의 정취를 읊었다.
파란 털 전립에 자주빛 비단 치마. 서관의 제일가는 검무기 추강월이라. 지는 해 나루터의 끝 물살이 덮쳐올 듯, 개인 날 갑자기 비바람이 몰아칠 듯. 돌아보면 섬뜩 생기 돋는 고운 눈썹, 붉은 소매 너울너울 고운 자태 애를 끊는구나. 다시 그림배에 내려와 노래 한 곡조 부르고 나니 물빛 산빛 모두가 아득히도 푸르구나.
당시엔 무대에서 풍류가 끝나면 배를 띄우고 한바탕 놀았던 것 같다. 이런 유형의 풍류는 시「범주」6)에서도 보인다.
「관서 악부」 46곡에 검무기 추강월의 이력이 언급되어 있다. 63세 석북 서거 1년 전의 작품이다.
쌍쌍이 돌아가는 검무춤 당(堂) 가득 찬기가 도네 雙廻劍舞滿堂寒
등잔불 춤 소매에 풍우가 인다 手勢燈前風雨闌
열 세 살 때 이 춤을 익힌 추강월이 十三能學秋江月
밤마다 동헌에 와 선을 보이나니 來作東軒夜夜看
-신광수의「관서 악부」46
열 세 살 때 이 춤을 배웠고 밤마다 동헌에 와 검무춤을 선보인 것을 보면 당시 유명 연예인으로서의 추강월 인기가 어느 정도인가를 짐작할 수 있다.
「한벽당 12곡」 3곡에도 검무 춤이 묘사되어 있다.
전주 색시들은 남장을 좋아해 全州兒女學男裝
한벽당 속에 검무 춤이 한창이제 寒碧堂中劍舞長
유리빛 푸른 물에 그림자가 떠돌아 轉到溜漓看不見
온 당 기세가 서릿발 같제 滿堂回首氣如霜
- 신석초 역
「한벽당 12곡」은 전주에 사또로 부임하여 한벽당에서 열린 부임 축하연을 보고 직접 지은 詩다. 38세 영조 25년 1749년 작이다. 당시 사회의 모습인 농촌의 피폐상과 관리의 부정과 횡포, 하층민의 고난을 사실적인 필치로 노래한 시이다.
한벽당 검무춤이 한창이다. 유리빛 맑은 물에 그림자가 떠돌고 온 당의 기세가 서릿발 같다. 당시의 풍속과 향락상의 일면을 살펴볼 수 있는 자료이다.
석북의, 줄타기, 칼춤, 노래, 그림 등 연희, 예인 관련 작품들의 사실적 묘사는 조선 후기 풍류양상이나 생활상, 풍속 등 가치가 있는 사료로서의 일면도 보여주고 있다.
석북은 영조 36년 49세 때 생자를 마련하기 위해 세모에 관서로 먼 길을 떠났다.8) 관서 여행길에서 점술가인 유운태를 만났다.
봉산에 있는 점술가 유운태에 준 두 수의 시가 있다.
1
남쪽에서 들은 이름 10년도 지났건만 南國聞名己十年
봉산 천리 길이 하 멀어 인연이 없었네 鳳山千里到無緣
오늘 아침 필마로 돌아든 서관길에 今朝匹馬西關路
복채 대신 시 한 수나 써주고 가네 只把新詩當卜錢
2
유생이 촉나라 군평9) 보다 더 낫다하네 劉生賢勝蜀君平
복채도 아니 받고 이름만 세상에 가득하고 卜不要錢滿世名
길 떠나며 한 쌍의 빗을 던져 주노니 臨行却贈雙梳子
작별 후 머리 빗으며 날 생각해 주게나 別後梳頭憶我情
-신광수의 「증봉산일자유운태(贈鳳山日者劉雲泰)」
남쪽에서 유운태란 이름을 들은지 10년이 지났건만 봉산 천리 길이 하도 멀어 인연이 없었다. 오늘 아침에야 필마로 돌아든 서관길에서 만났다. 거기서 복채 대신 시 한 편을 써주었다.
유생의 점술이 영험해 촉의 군평보다 더 낫다. 복채도 아니 받고 세상에 이름만 가득, 유생은 유명 점술가였다. 한쌍의 빗을 주고 떠나니 빗을 때마다 나를 기억해달고 하였다. 석북은 신분을 넘어 누구에게도 다정다감한 시인이었다.
유운태(劉雲台)는 생몰 미상으로 조선 후기에 살았던 사람이다. 황해도 봉산(鳳山)에서 활동했으며 호는 봉강선생(鳳岡先生)이다. 봉산의 맹인으로 7세에 실명하였으나 6세에 『사기』를 읽었고 고체시를 지었다. 실명 후에도 부지런히 학문을 익혀 13경서와 『주역』을 읽고 깨우쳤다. 선천적인 재능에 후천적인 노력을 더해 학문에도 힘썼다. 복서(卜筮)에 크게 통하여 백중에 하나도 실수하는 것이 없었다고 한다.10)
그는 답답하고 막막해서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점을 쳐주기도 했지만 부모를 공경하고, 나라에 충성하고, 신의를 지키는 것이 사람답게 사는 도리이며 그렇게 사는 것이 앞날을 내다보고 닥친 어려움을 해결하는 방법이라고 일러줬다11)고 한다.
점술가로서 능력도 능력이지만 사람의 도리를 지키는 것이 해결 방안이라고 했으니 당대에 명성을 날린 것도 우연만은 아닌 것 같다. 유운태는 일반 점쟁이들과는 달리 그 차원과 격이 높았다.
석북은 신분에 관계없이 재인줄타기, 검무기 뿐만이 아닌 하층민 점술인에게도 이렇게 깊은 애정과 관심을 가졌다.
석북의 또 다른 따뜻한 인간미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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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이기현,『신광수의 문학연구』(도서출판 보고사,1996),165쪽.
2)한국민속대백과사전(줄타기,전경욱 집필) 참조.
3)기산의 풍속화 기산의 풍속화 중 「광대 줄 타고」에서 줄광대와 어릿광대 그리고 삼현육각패가 나온다. 고깔을 쓰고 부채를 든 줄광대의 춤이 보인다. 기산은 생몰연대 미상으로 구한말 부산·인천·원산 등 개항장을 중심으로 활동한 풍속화가다. OhmyNews 22.06.23 17:14, 김태균의 만화방창 풍류 1화, 「단원 김홍도의 무동... 조선의 혼, 광대 꿈이 피다」
4)검무는 칼을 휘두르며 추는 춤이다. 신라 소년 황창(黃昌)이 백제에 들어가 칼춤을 추다가 백제의 왕을 죽이고 자기도 죽자, 신라인들이 그를 추모하기 위해 그 얼굴을 본떠 가면을 쓰고 칼춤을 추기 시작한 데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5)이기현, 앞의 책, 165쪽.
6) 능파무 다 추고 붉은 난간으로 내려오네./ 협강물 푸르고 푸른데 목란주 띄워놓고/ 무산 열 두 봉에 불어 예는 옥저소리/ 흰구름 가을빛에 온 가람이 차구나. 신석초 역,『석북시집 자하시집』(명문당,2003),238쪽. 이기현, 앞의 책,167쪽.참조.
7)혜원 신윤복은 석북 신광수와 같은 고령 신씨이다. 오세창의 『근역서화징』에 “자는 입보이고 호는 혜원이며 본관은 고령이다.첨사 신한평의 아들이며 벼슬은 첨사이며, 풍속화를 잘 그렸다.”라는 기록이 있다. 혜원은 신말주의 11손이며 석북은 신말주의 형 신중주의 10세손이다.
8)경진 49년 11월 초 4일 밤 송강우거에서 아우 진택이 석북 관서 여행을 배웅하러 왔다. 신석초역,앞의 책, 204쪽.
9)군평은 전한 촉나라 사람으로 일찍 벼슬을 포기하고 성도에 은거, 복서를 업으로 삼고 살다 일생을 마친 인물이다.
10)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시스템.
11)역사산책, 조선시대 명복 유운태, CN드림, 2010.11.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