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사와 미당, 그리고 석초(石艸)
육사와 미당, 그리고 석초(石艸)
  • 뉴스서천 기자
  • 승인 2004.08.27 00:00
  • 호수 23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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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당 박근혜 씨의 ‘국가 정체성’ 발언에서부터 촉발된 과거사진상규명에 대한 논쟁으로 정치권이 시끄럽다.

왜곡된 과거사를 바로 잡아야 된다는 당위에 대해서는 거듭 얘기할 필요도 없겠으나, 해방 후 친미파로 변신한 친일파가 반공 이데올로기를 앞세워 정권을 장악하고 수십 년 동안 정치·사회·문화 권력을 쥔 대가로 축적한 재부(財富)에 대한 처리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이 엇갈린다.

원칙적으로 민족을 판 대가로 축적한 재산은 몰수해야 마땅하다는 의견이 백 번 옳지만, 오랜 시간이 지났고 연좌제는 옳지 않다는 의견도 일면 현실적이고 타당한 측면이 있다. 그러나 이 논쟁은 좀더 중요한 문제를 간과토록 하는 오류를 범한다.

사실 더 중요한 건 그들이 강탈하고 축적한 재산을 환수하는 것보다 반세기 동안 권력을 잡은 채 우리들에게 각인하고 훈육했던 ‘역사인식’과 ‘가치판단’에 대한 왜곡을 바로잡는 것이다. 물질적 강탈보다 더 무섭고 집요한 게 정신적 강탈이다.

일본이 식민시대 말기에 문화정책으로 조선을 지배하려고 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똑 같은 논리와 방법으로 친일파들은 반세기 동안 우리를 지배했다.

육사(陸史) 이원록과 미당(未堂) 서정주 그리고 석초(石艸) 신응식, 이 세 시인은 1930대 식민지 시대 때 문단에서 활동하기 시작하여 각각 독특한 문학적 성과로써 우리 현대 시문학사에 큰 획을 그은 사람들이다.

이 세 시인은 시 세계가 상이할 뿐더러 삶의 이력도 판이하다. 육사는 일찍이 ‘의열단’ 활동을 하여 옥고를 치렀던 항일운동가고 그에 걸맞는 남성적이며 민족주의적인 필치를 보였으나,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 미당은 ‘시인부락’ 동인 활동을 통해 탐미주의적이며 토속적인 서정성을 바탕으로 한 작품들을 발표했다.

석초는 카프(KAPF)에 가입했으나 카프의 도식주의적 경향에 실망하여 곧 탈퇴하고 아주 절친한 관계였던 이육사를 비롯한 김광균 등과 ‘자오선’ 동인으로서 노장사상을 바탕으로 한 허무주의적 시풍을 선보였다. 이들의 삶은 일제의 식민침탈과 민족성 말살정책이 극에 다다르던 1940년대 초·중반에 이르러 더욱 극적인 대조를 이룬다.

육사는 항일투쟁을 하기 위해 중국으로 갔다가 옥사하고, 석초는 붓을 꺾은 채 고향인 이곳, 서천에 낙향하여 은거한다. 미당은 각종 친일 잡지나 신문을 통해 일제의 징병과 수탈 등을 미화하고 찬양하는 친일 작품을 대거 발표한다. 육사는 적극적인 저항을, 석초는 소극적인 저항을 선택했지만 미당은 투항을 선택했다.

어느 작가의 작품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감상할지는 각 개인의 판단과 감성에 근거하므로 지극히 주관적이지만, 작가의 문학적 성과와 문학인으로서의 위치는 공신력을 지닌 문학인들에 의한 비평과 평가에 의해 ‘객관적’으로 결정된다. 그런데 이 ‘객관적’이라는 게 ‘허구’일 수도 있다는 게 문제다.

미당 사후 모 유력 일간지 주도로 ‘미당 문학상’이 제정되는 계기로 촉발된 ‘서정주 친일문학 논쟁’ 과정에서 어느 평론가가 지적했던 바, 미당의 문학적 성과가 과도하게 부풀려진 측면이 많고 미당의 신격화는 친일문학인에 대한 처벌과 역사적 평가가 부재했던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이다.

미당은 이용악, 백석, 오장환, 정지용, 박태원, 이태준 등 쟁쟁한 작가들이 대거 월북이나 납북된 문단 상황에서 문학권력의 핵심이 되었고 그 권력 밑에서 자란 문학인들에 의해 ‘근대 시문학사의 최고 시인’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강요된 ‘가치판단’은 아직도 제도권 교육과 학습을 통해 후세들에게 ‘전수’되고 있다.

이는 친일문학인의 이름까지 포함된 수많은 문학상은 있지만, ‘육사문학상’이나 ‘석초문학상’은 존재하지 않는 현실과도 맞닿아 있다. 그 왜곡된 가치판단의 고리를 신석초 시인의 고향인 서천에서라도 먼저 깨야하지 않을까.

이경진 <서천문화원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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