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론광장
연기(燕岐)자치시 대전광역시 통합 회덕(懷德Hoideok)특별시 신설해야
 김민수
 2016-06-15 13:36:11  |   조회: 3326
첨부파일 : -
연기(燕岐)자치시 대전광역시 통합 회덕(懷德Hoideok)특별시 신설해야



http://blog.naver.com/msk7613



옛 도읍인 고도(古都)·옛 궁궐인 고궁(古宮)· 궁장(宮墻) 밖 관아인 궐외각사(闕外各司:국유화), 황단(皇壇), 사직단, 제단(祭壇) 터·관아(官衙) 터·옛 사찰 터· 최고 교육기관 성균관(成均館) 터· 동부학당·서부학당·남부학당·중부학당의 4학(四學) 터·선조(先祖)나 선현(先賢)의 신주(神主)나 영정(影幀)을 모셔두고 배향하는 태묘(太廟), 사우(祠宇) 터, 성곽(城郭) ·성(城) 터·시장(市場) 터·교지(橋址)·궁궐 안에 있던 후원인 상림원(上林苑) 등은 문화재보호법에 의거한 사적(史蹟),고도보존법에 의거한 역사문화환경 특별보존지구 지정 대상이다. 조선국(朝鮮國1393-1897),대한국(大韓國1897- ) 도읍 한성(漢城 Hanseong:1395- )의 북쪽 백악(白嶽 Baekak) 아래에 1395년 6월 6일 고려국 지명인 한양을 조선국 한성(漢城)으로 개칭한 이후에 낙성한 북궐(北闕) 경복궁(景福宮Gyeongbokgoong)의 상림원(上林苑:비서실,경호실 철거, 원형복원) 서편의 경농재(慶農齋), 동편의 경무대(景武臺), 북편의 5운각(五雲閣) 권역과 광화문,건춘문,영추문 앞 궐외각사(闕外各司Gwalwoigaksa:일본군국주의가 불법 매각한 국유문화재 국가 귀속,고증이 불가한 인물조각상(묘(廟),사(祠)에 봉안해야) 제작 후 멋대로 광장,공원 설치 금지)의 문화재보호구역(500m 안 현상변경 불허가 기본 원칙,문화재 터 경계에서 10미터 떨어진 지점 지표면에서 바라본 앙각 27도 아래로 현상변경 허가 제한해야)을 역사문화환경 특별보존지구,역사문화환경 보존육성지구 및 사적(史蹟)으로 지정하고 100년 이상의 문화재 복원 대상을 우선 순위를 정하여 원형 복원하고 문화재보호구역 500m 안 지역에서 문화재 터 경계로부터 10m 떨어진 지점 지표면에서 올려다보는 각도인 앙각 27도에 해당하는 높이 아래로 건축물 증축,신축을 제한하여야 한다.


​경복궁(景福宮) 상림원,궐외각사로부터 100m 이내의 고도 역사문화경관에 반하는 현대 건축물, 시설물의 신축(新築)·증축(增築)·개축(改築),인물조각상을 고증없이 멋대로 제작 후 광장,공원 설치 금지, 문화재보호구역(500m 안 현상변경 불허가 기본 원칙,500m 안 문화재 터에서 10미터 떨어진 지점 지표면에서 바라본 앙각 27도 아래로 건축 제한)의 건물(建物)의 층고(層高)를 2층 · 6m 이하로 제한하고 택지(宅地) 조성이나 토지의 개간(開墾) 또는 형질 변경, 수목 심기 및 나무 베기 또는 토석류의 캐기, 도로의 신설 및 확장·포장 등을 제한하여 경복궁(景福宮) 전(殿), 당(堂), 합(閤), 헌(軒), 각(閣), 재(齋), 누(樓), 대(臺), 정(亭), 문(門), 교(橋),상림원(上林苑:국유화),궐내각사(콘크리트 블럭 제거 마사토 포장),궐외각사(국유문화재 국유화),1923 - 1924년 일본군국주의 총독부가 철거한 망루 서십자각,어도,해치상의 역사적 문화경관을 원형복원하고 광화문(光化門),건춘문(建春門),영추문(迎秋門) 앞 궐외각사(闕外各司), 상림원(上林苑) 권역의 비서실(경호실), 소격서,태화궁 터의 국무총리 공관,감사원, 3군부 터의 정부서울청사, 경운궁 동쪽,군기시 터의 서울시 청사,인권위원회 청사, 사복시 옆 종로구청사,주한 외국대사관(문화재보호구역 500m 안 현상변경 불허가 기본 원칙, 문화재 터에서 10미터 떨어진 지점 지표면에서 바라본 앙각 27도 아래로 제한),언론사, 종친부,규장각,사간원,장생전,장원서,소격서,삼청전,성수청,제약청 터의 서양갤러리 등 현대 건축물, 시설물을 철거(撤去)하고 경복궁(景福宮) 중건한 1868년이 아닌 대한시대 제정기(帝政期)를 기준으로 원형 복원하여야 한다.


지명(地名)은 우리 한민족의 문화(文化)와 역사(歷史)를 보여주는 문화재(文化財)이므로 회덕(懷德Hoideok),연기(燕岐Yeongi),황단(皇壇:Hwangdan),경운궁(慶運宮:Gyeongwoongoong),태묘(太廟:Taemyo),한성(漢城:Hanseong),보신루(普信樓:Bosinloo),둑신묘(纛神廟Dooksinmyo),장충단(奬忠壇Jangchoongdan),평시서(平市署Peongsiseo),관제묘(關帝廟Gwanjemyo),위례(尉禮Wuilea),궐파(厥破),마전(麻田),풍양궁(豐壤宮Poongyanggoong),연희궁(衍禧宮Yeonheigoong),선농단(先農壇Seonnongdan),명례방(明禮坊) 이현(泥峴진고개)의 명례궁(明禮宮Meongneagoong) 등 역사(歷史) 문화(文化) 지명(地名)을 시도 및 시군구 명칭,도로명주소,버스정류장,전철역,건물,학교,교량,공항,공원 명칭으로 부여하여 전통문화의 계승,민족문화의 창달을 위해 노력하여야 한다.황제(皇帝),국왕의 묘호(廟號Myoho),조상의 시호(諡號Siho),위인의 인명(人名)에 쓰인 글자를 지명(地名), 도로명주소,버스정류장,전철역,건물,학교,교량,공항,공원 이름에 사용하지 않는 피휘(避諱Pihwi)하여야 한다. 과천청사역은 과주(果州)역으로,경마공원역은 율진(栗津)역으로,대공원역은 율목(栗木)역으로,뚝섬역을 둑도(纛島),둑신묘(纛神廟)역으로, 충무로역은 목멱산(木覓山)역으로, 종각역은 보신루(普信樓Bosin​loo)역으로, 광화문역은 기로소(耆老所)역으로, 명동역은 명례궁(明禮宮)역으로,안국역은 안동궁(安洞宮)역으로, 종로5가역은 이현궁(梨峴宮)역으로, 혜화역은 성균관(成均館)역으로, 종로3가역은 태묘(太廟),평시서(平市署)역으로, 제기역은 선농단(先農壇)역으로, 연세대역은 연희궁(衍禧宮)역으로, 서대문역은 돈의문(敦義門)역으로, 충정로역은 경기 감영(京畿 監營)역으로, 장충공원역은 장충단(奬忠壇)역으로, 동묘역은 관제묘(關帝廟)역으로 표기하여야 한다.


회덕(懷德Hoideok)은 본래 백제의 우술군(雨述郡)인데 신라에서 비풍군(比豐郡)으로 고쳤고 고려에서 회덕현으로 고쳐 현종(顯宗) 9년에 공주(公州) 임내에 붙이었다가 명종(明宗) 2년 임진에 비로소 감무(監務)를 두었다. 조선국에서도 그대로 따랐고 태종(太宗) 13년 계사에 예(例)에 의하여 현감(縣監)으로 고쳤다.진산(鎭山)으로 삼는 계족산(鷄足山) 4방 경계는 동쪽으로 청주(淸州)에 이르기 14리, 서쪽으로 공주(公州)에 이르기 7리, 남쪽으로 진산(珍山)에 이르기 22리, 북쪽으로 문의(文義)에 이르기 24리이다.호 수가 3백 호요, 인구가 1천 2백 66명이다. 군정은 시위군(侍衛軍)이 7명이요, 수호군(守護軍)이 4명이요, 선군(船軍)이 1백 49명이다.토성(土姓)이 4이니, 황(黃)·임(任)·이(李)·방(房)이요, 망성(亡姓)이 1이니 곽(郭)이요, 정민역(貞民驛)의 속성(續姓)이 2이니 배(裵)·김(金)이다.땅이 기름지고 메마른 것이 반반이며 간전(墾田)이 2천 6백 88결이요 논이 5분의 2가 된다. 토의(土宜)는 오곡과 모과이다. 토공(土貢)은 느타리·싸리버섯·칠·잡깃·밀·대추·여우가죽·삵괭이가죽·검은 담비의 털가죽인 산달피(山獺皮)·지초·종이요, 약재(藥材)는 오배자(五倍子)이요, 토산(土産)은 석철(石鐵)이다. 현의 북쪽 20리 직동(稷洞)에서 나는데, 하품(下品)이다.계족산 석성(鷄足山石城)은 현의 동쪽 10리에 있는데 4면이 매우 험하며, 둘레가 3백 34보 2척이 되고, 안에 샘이 하나 있는데 겨울이나 여름에도 마르지 아니한다. 향인(鄕人)이 이르기를 "하늘이 가물 때 이 산이 울면 반드시 비가 온다."고 한다. 역(驛)이 1이니 정민(貞民)이다. 세속이 잘못 전민(田民)이라 한다. 이원진(利遠津)은 속칭 형각진(荊角津)이라 하며 나룻배가 있다. 봉화가 1곳이니 계족산(鷄足山)이다. 동쪽으로 옥천(沃川) 환산(環山)에, 북쪽으로 문의(文義) 소산(所山)에 응한다. 월경처(越境處)는 유성(儒城)의 동촌(東村) 낭산리(郞山里)가 현의 남면(南面)에 들어와 있다.


연기(燕岐Yeongi)는 본래 백제국의 두잉지현(豆仍只縣)인데 신라국이 연기현(燕岐縣)으로 고쳐 연산군(燕山郡)의 영현(領縣)을 삼았고 고려국 현종(顯宗) 9년 무오에 청주(淸州) 임내에 붙였다가 명종(明宗) 임진에 비로소 감무(監務)를 두었다. 그 뒤에 목천 감무(木川 監務)로 연기를 겸임하게 하다가 조선국 태조(太祖) 정축에 다시 두 현을 갈라서 각기 감무를 두고, 태종(太宗) 갑오에 전의(全義)에 병합하여 전기(全岐)로 고쳤다가 병신에 다시 연기 현감을 두었다. 원수산(元帥山)이 연기현의 남쪽에 있다. 충렬왕(忠烈王) 17년 신묘에 원국의 반적(叛賊)인 합단(哈丹) 병사가 동계(東界)에 침입하여 철령(鐵嶺)을 넘어서 교주도(交州道)에 마구 들어오므로 충렬왕이 원국에 알려 구원병을 청하니 원국 세조가 평장(平章) 설합간(薛閤干)을 보내어 보병(步兵)과 마병(馬兵) 1만 3천 명을 거느리고 와서 우리를 도와주므로 충렬왕이 만호(萬戶) 인후(印侯)로 하여금 중익(中翼)을, 한희유(韓希愈)로 좌익(左翼)을, 김절(金折)로 우익(右翼)을 거느리게 하여 원국 군사와 함께 합단(哈丹) 적병을 맞아서 연기현의 남쪽 정좌산(正左山) 아래에서 싸워 크게 이겨서 달아나는 적을 쫓아 공주(公州) 웅진(熊津)에 이르렀는데 시체가 30여 리에 널렸고 부녀(婦女)와 안마(鞍馬)·보물들을 얻은 것이 이루 헤아릴 수 없게 되었으므로 세속에서 지금도 군사를 주둔하였던 곳을 원수산이라 한다.대천(大川)은 웅진(熊津)이다. 3국사(三國史)의 신라(新羅) 4독(瀆)에 "웅천하(熊川河)"라고 쓰고서 중사(中祀)에 실었는데 조선국도 그대로 따라서 봄·가을에 향축(香祝)을 내려 제사를 지낸다. 4방 경계는 동쪽으로 청주에 이르기 15리, 서쪽으로 공주(公州)에 이르기 11리, 남쪽으로 공주에 이르기 5리, 북쪽으로 전의에 이르기 18리이다.호 수가 3백 48호요, 인구가 1천 4백 46명이다. 군정은 시위군(侍衛軍)이 8명, 진군(鎭軍)이 10명, 선군(船軍)이 1백 56명이다.토성(土姓)이 5이니 위(魏)·하(河)·전(全)·경(耿)·장(萇)이요 내성(來姓)이 1이니 왕(王)이요 한성에서 왔다. 속성(續姓)이 2이니 김(金)·강(康)이다.땅이 기름진 것이 적고 메마른 것이 많다. 간전(墾田)은 2천 9백 16결이요 논이 5분의 2에 좀 모자란다. 토의(土宜)는 오곡과 조·팥·메밀·뽕나무다. 토공(土貢)은 대추·칠·잡깃·여우가죽 호피(狐皮)·삵괭이가죽 이피(狸皮)·수달피(水獺皮)요, 약재(藥材)는 인삼·산골 자연동(自然洞)·변(籩)에 담는 마름 열매인 능인(菱仁)이다. 자기소(磁器所)가 1이니 현의 북쪽 요혜방(要惠方)에 있고 중품이다. 도기소(陶器所)가 1이니 요혜방에 있다. 하품이다.봉화가 1곳이니 현의 남쪽 용수산(龍帥山)이다. 동쪽으로 청주 저성(猪城)에 서쪽으로 공주 독성(禿城)에 응한다. 금사제(金沙堤)가 현의 서쪽에 있는데 길이가 65척이다. 전지 70결을 관개(灌漑)한다.
2016-06-15 13:36:11
39.118.17.188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