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취재> 금강하구둑 개설 그 이후 <제1회>
<기획취재> 금강하구둑 개설 그 이후 <제1회>
  • 편집국 기자
  • 승인 2006.09.15 00:00
  • 호수 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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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취재 및 보도 일정
■ 취재기간 : 9월4~10월 31일 (일본해안 10월16~20일)
■ 보도기간 : 9월15~11월10일(8회 연재)
1회 (9월 15일) : 금강은 이렇게 흐른다
2회 (9월 22일) : 하구둑 개설에 따른 금강의 어제와 오늘 (수질변화, 토사퇴적 등)
3회 (9월 29일) : 금강과 기수지역의 생태 (어족, 습지·수생 식물)
4회 (10월 13일) : 하구둑 개설에 이후 금강포구의 생활환경사
5회 (10월 20일) : 우리나라의 갯벌·습지 보존 정책
6회 (10월 27일) : 외국의 갯벌·습지 보존 실태 (일본을 중심으로)
7회 (11월 03일) : 일본은 왜 갯벌 되찾기에 나섰나
8회 (11월 10일) :  금강 기수지역과 장항갯벌 이렇게 하자    


▲ 서천 하구둑전경 금강은 이렇게 흐른다 이 기획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 사업으로 하게 되었음을 우선 밝힌다.1983~1990년에 건설된 금강하구둑, 착공초기 서천군민들은 이웃 군산시와의 교류가 활발해진다는 것 때문에 지역경제에 많은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했다. 그 시기에는 공장이나 도로 건설 등 개발행위는 절대적인 지지를 받고 시행됐다. 이런 개발행위가 현대화, 발전이라는 것으로 포장돼 있었기 때문에 자연환경에 대해 언급조차 없었다. 그러나 지금 기대했던 지역경제 발전은 정 반대의 현상으로 나타나고 금강하구둑 건설로인한 자연환경 파괴는 곧 금강포구사람들과 장항 사람들의 건강한 삶의 파괴로 이어졌다. 그리고 우리는 그 돌파구를 장항국가산업단지라는 또 다른 자연환경파괴에서 찾으려 하고 있다. 이번 기획취재에서 모든 옳고 그름의 흑백을 명확히 가릴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최소한 과거에 무엇이 잘못됐는지, 현재 증상이 어느 정도인지 진단하는 자는 것이다. 그래서 앞으로 일를 추진함에 있어서 현명한 판단을 하는데 도움이 되자는 것이다.<편집자주>
기획취재를 시작하며
전북 장수군 장수읍 수분리(水分里) 신무산(神舞山:897m)에서 발원한 금강은 진안-무주-금산-영동-옥천-대전-연기-공주-부여-논산-강경을 돌아 서천 앞바다로 빠져나간다. 길이는 발원지에서 하구둑까지 397.25km이며 유역면적은 9,912.15㎢로 속리산 계곡의 물을 받아 보은을 거쳐 흘러드는 보청천과 진천, 청주, 조치원을 통과해 합류하는 미호천 등의 크고 작은 지천을 거느린 금강은 남한에서는 한강, 낙동강 다음으로 큰 강이다.

상류인 무주, 진안, 장수와 금산, 영동지역은 산지가 험준하고 자연경관이 빼어나며 물도 맑고 투명하다. 이름 그대로 비단 자락 같은 강줄기가 굽이굽이 이어지며 북쪽을 향해 흐른다. 계룡산 줄기를 감싸안으며 연기-공주-부여로 이어지는 금강의 가운데 토막은 백제의 흥망성쇠에서부터 우금치 마루로 흐르던 동학농민군의 깃발에 이르기까지 이 땅의 역사를 보듬으며 유유히 흐르는 강이다. <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공주에서는 웅진강, 부여에서는 백마강으로 부르고 있다.


강경에 이르러 강폭은 넓어지며 내포평야의 기름진 들판을 적신 탁한 물이 흘러든다. 하구로부터는 밀물을 타고 바닷물이 역류해 올라온다. 채만식은 그의 소설 ‘탁류’에서 금강 하류를 이렇게 그리고 있다.

“강경에 다다르면 장꾼들의 흥정하는 소리와 생선비린내에 고요하던 수면의 꿈은 깨어진다. 물은 탁하다. 예서부터가 옳게 금강이다. 형은 서서남으로 빗밋이 충청 전라 양도의 접경을 골타고 흐른다. 이로부터서 물은 조수까지 휩쓸려 더욱 흐리나 그득하니 벅차고 강 넓이가 훨씬 퍼진 게 제법 양양하다.”

금강포구 풍경의 어제와 오늘
강경시내까지 파고드는 조수는 곡창지대와 칠산바다 황금어장을 연결하는 교통 인프라 역할을 하여 강경을 평양, 대구와 함께 전국 3대 시장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조기의 성어기인 3~6월에는 하루 백 여척의 배가 드나들었고 여각, 객주, 상선을 갖춘 거상들이 이곳을 찾았다.

서해의 각종 수산물이 이곳에 입하되어 전국으로 퍼져나간 것이었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5일장이 서는 4일과 9일이면 몰려든 상인들로 포구는 활기가 넘쳤었다. ‘곰개’라 불리던 웅포는 조선 초기에 덕성창이 설치되었으며 후기에는 해창으로 전라 충청도는 물론 멀리 제주도 어선도 드나들던 집산항으로 연중 파시를 이루었다 한다.

이처럼 번성을 누리던 상업도시가 쇠락의 길을 걷게 된 것은 철도가 수운을 대신하면서부터였다. 1912년에 군산선이 개통되었고 1922년에 장항선이 개통되었다. 일제가 쌀 등의 수탈을 목적으로 세운 철도가 강경포구의 역할을 흡수하기 시작한 것이다. 강경 포구는 발동기선으로 맥을 이어오다 1970년대에 와서 고속도로가 생겨나면서 완전 폐항이 되었다.

금강하류 지역의 주민들의 삶의 양태를 바꾸었던 산업화로의 진행은 어쩌면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주민들은 이번에는 자연의 일부로서 자연과 함께 순환하며 사는 생태적 삶 자체를 위협하는 위험에 점점 노출되어가고 있다. 금강하구둑이라는 인위적인 자연환경의 변화가 불러온 결과이다.
 
금강하구둑 개설
쌀 생산을 목적으로 서해로 흘러드는 작은 하천들의 입구를 막아 간척을 해오던 일제의 뒤를 이어 간척사업을 재개한 것은 박정희 정권 들어서부터였다. -<표>참조-전북 부안군에서 벌어진 계화도 간척사업이 그 출발이다.



이후 70년대에 들어 간척사업은 예전과는 양상을 달리했다. 발달된 토목기술을 앞세워 큰 강 하구를 막기 시작한 것이다.

금강 하구는 1990년에 막혔다. 금강하구둑은 길이가 1,841m, 배수갑문이 714m로 농업용수와 공업용수 확보를 위한 담수호를 조성할 목적으로 1983년 착공하여 1990년 10월에 완공했다. 용수 취수시설이나 기반조성사업 등이 완공되지 않아 배수갑문이 개방되어 해수가 유통되다가 1994년 10월에 배수갑문을 완전 폐쇄했다.

금강하구둑의 완공과 담수호 금강호로 인해 장항-군산간 교통이 편리해졌으며 농경지가 늘어나고 침수피해가 줄어들었다. 또한 군산 등 공업지역에 안정적으로 물을 공급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혜택 이면에 는 환경파괴로 인한 재앙이 도사리고 있다.

금강호(錦江湖)는 아프다
우선 민물과 짠물이 교차하는 기수역 생태계가 파괴됨으로써 어족자원의 고갈을 불러왔고 이는 먼 바다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 또한 수질 개선 등에 막대한 비용을 쏟아 부어도 죽음의 호수가 돼가고 있는 영산호를 닮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심각한 것은 하구둑 안팎의 토사 퇴적문제이다. 이미 군산 내항은 기능을 거의 상실했으며 상류에서 떠내려 오는 토사가 하구둑에 갇혀 쌓이면서 금강호의 수심이 점점 얕아지고 있다. 이 같은 하류의 토사퇴적현상으로 중류에 해당하는 논산·부여군 저지대를 중심으로 여름철 침수현상이 빈발하고 있다.

이제 더 큰 재앙을 맞기 이전에 금강하구둑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점을 살펴 대책을 세울 필요가 있다. 일본 농림성은 2005년 11월 17일에 간척농지를 만들기 위해 1981년에 완성된 시마네현의 나까우미의 모리야마 제방(森山堤防, 3km)을 약60m 철거하기로 하는 결정을 내렸다. 철거의 이유는 해당 자치단체인 토토리현(鳥取縣)이 제방으로 인하여 주변 지역 주택의 침수위험이 있다고 주장하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한강을 제외한 서해로 흐르는 모든 강의 하구를 이미 틀어막은 상태에서 일본 나까우미 간척사업의 예를 타산지석으로 삼기에는 이미 늦었다. 그렇다고 제방을 더 높이거나 강바닥을 준설하는 것만으로는 근본적인 대책이 될 수 없으며 국민 혈세만 낭비할 뿐이다

<뉴스서천 기획취재단, 정리=프리랜서 허정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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