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거벗은 임금님
벌거벗은 임금님
  • 편집국 기자
  • 승인 2006.09.22 00:00
  • 호수 33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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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종태
<쾌도난마 한국경제>
공동저자

1958년 모스크바를 방문하고 귀국한 마오쩌둥은 급진적인 경제발전 계획을 발표했다. 그 목표인즉슨 “15년 안에 미국과 영국을 따라잡아” 경제 및 군사 부문에서 세계 최강대국이 되겠다는 것이었다.

마오는 정치대국의 야무진 꿈도 가지고 있었다. 장차 “지구통제위를 설치하여 지구의 통일 계획을 수립하겠다!” 로봇태권V의 카프 박사나 마징가Z의 헬 박사, 007 시리즈의 블로펠트 등 지구정복 야망에 불타는 악당 계보의 원형이 여기 있다. 아무튼 이렇게 대약진운동은 시작되었다.


그런데 15년 안(대내적으로는 10년)에 미국과 영국을 따라 잡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상상을 초월하는 산업화와 농업 생산력 상승이 관건이었다. 그래서 마오는 우선 ‘산업의 씨앗’인 강철 생산량을 대폭 늘리기로 했다.

개발도상국의 처지인 중국의 입장에서 강철산업을 육성하려면 어떻게든 외자를 만들어(빌리든, 식량수출로 벌어들이든) 해외의 노하우와 기술, 설비를 사들이고 이를 통해 대규모 플랜트를 세워야했을 것이다. 그러나 마오는 이런 방식을 거부하고 그야말로 전적으로 ‘인민에 의지’하기로 했다. 어떻게?

그는 전 인민들에게 ‘뒷마당 용광로’를 세우라고 지시했다. 집마다, 학교마다, 직장마다 작은 용광로를 설치해 놓고, 이곳에 인민들이 소유하고 있는 거의 모든 금속제품들을 무조건 기부하도록 강요했다.

중국 출신 영국 작가인 장융에 따르면 “조리기구, 쇠로 된 문손잡이, 여성의 머리핀은 물론이고 농기구와 심지어는 물탱크마저 용광로 속으로 들어갔다” 심지어 용광로의 연료로 사용하기 위해 농민들의 집을 헐고, 인근의 산과 언덕들은 벌목으로 민둥산을 만들어 버렸다. 그러나 이렇게 만든 강철은 당연히 산업발전에 사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서 거의 전량이 폐기되었다. 이 사업에 거의 1억 명의 중국 인민이 동원됐다.

식량생산에서도 마오는 상식을 심하게 비켜갔다. 인민공사를 설립, 농민들의 생산수단과 생활수단을 집중시킨 극좌적 노선은 차치하고라도 공상에 가까운 생산량 증대 선전을 벌였던 것이다. 중국공산당의 기관지인 <인민일보>는 정상적인 산출량의 수백 배에 달하는 식량을 생산하는 모범 지역을 날조해 선전했다. 당은 곤봉과 총으로 생산 책임자에게 말도 안 되는 증산목표를 강요했다.

<인민일보>는 무게가 200kg인 양배추, 트럭의 절반 크기인 오이, 암소만한 돼지가 생산되었다고 ‘사기’를 쳤고 인민들은 이를 모두 믿는 척했다. 안데르센의 ‘벌거벗은 임금님’이 당대의 중국 현실에서 그대로 구현되었다.

이 시기 중국의 농촌에 가면 농민들이 빗자루를 들고 논두렁을 뛰어다니며 굉음을 내지르는 광경을 쉽게 볼 수 있었다. 식량을 좀 먹는 참새를 박멸하라는 마오 주석의 지시에 따른 행동이었다. 참새가 논밭에 앉지 못해 지쳐 떨어지면 그것을 ‘박멸’한다는 기막힌 전술이었다.

그러나 이 운동의 성공으로 참새가 박멸되자 해충들이 크게 번성하는 파멸적 결과가 초래됐다. 결국 중국 정부는 ‘극비’로 소련에 서한을 보내 “참새 20만 마리만 보내 달라”고 애원해야 했다.

대약진운동의 결과는 3천8백만 명의 아사였다. 굶주림과 과도한 노동의 결과이다. 이 같은 광란 어디에서도 ‘계급투쟁을 통한 사회발전’이라는 사회주의 원리의 흔적은 찾아보기 힘들다.

중국공산당의 황당한 역사는 이 나라가 최근 강화하고 있는 중화패권주의의 뿌리이다. 지난 9월 9일은 마오쩌둥의 사망 30주기였다. 그러나 지금까지도 중국공산당은 은폐와 말장난으로 마오의 과오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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