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하구둑 개설 그 이후 <제6회>
금강하구둑 개설 그 이후 <제6회>
  • 편집국 기자
  • 승인 2006.10.27 00:00
  • 호수 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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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서천 기획취재단 금강하구 탐사


 

금강호 수면은 ‘초록빛 바다’ 웅포대교까지 녹조현상 심각 금강하구둑은 전라북도와 충청남도 일원에 농업용수와 공업용수를 공급하고, 금강 주변 지역의 홍수를 조절할 목적으로 1983년 공사를 시작해 90년에 완공하였다. 94년부터 배수갑문을 차단해 담수호가 된 금강호는 토사 퇴적과 수질악화로 차츰 그 기능을 잃어가고 있다. <뉴스서천> 기획취재단이 지난 19일 배를 타고 금강호 곳곳을 돌아보았다.<편집자> ▲ 선외기 주인이자 금강호 어부인 화양면 옥포리 최종영 씨
그 많던 배들은 어디로 갔을까

포구마다 고깃배들로 북적거리던 금강에서 배를 빌려 타기란 쉽지 않았다. 수소문 끝에 화양면 옥포에서 1톤도 채 안되는 선외기 1척을 빌릴 수 있었다.

배를 부리는 최종영(68)씨는 20년 넘게 금강 하류를 누비며 고기잡이만 해 온 분으로 하구둑이 막히기 전까지만 해도 우어, 황복, 참게, 장어 등을 잡아 올려 하루 1~20만원 정도 수익을 올렸었다고 했다.

그러나 지금은 통발을 이용해 붕어나 빠가사리(동자개과의 민물고기) 2~3kg 정도 잡아 올려 수입이라 할 것도 없다고 한다. 현재 화양면에 내수면어업 면허를 가진 사람이 3명뿐이라고 했다.


▲ 수심을 재고 있는 취재단 배수갑문 부근 수심 590cm포구로 나가보니 수면은 온통 초록 물감을 풀어놓은 듯했다. 녹조현상이다. 녹조현상이란 호소 또는 유속이 느린 하천에 영양염류의 증가로 녹조류가 크게 늘어나 물빛이 녹색이 되는 현상이다. 이들이 수계 표면을 뒤덮음으로써 식물성 플랭크톤이나 수생식물의 광합성 작용을 차단하고 물 속의 용존산소량을 떨어뜨려 물고기를 죽음에 이르게 한다. 이날 하구둑에서 웅포대교에 이르기까지 금강호 전역에서 이러한 녹조가 발생한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 웅포대교까지 금강호 수면을 덮은 녹조류와 부유물.
뱃머리를 하구둑 쪽으로 돌려 호수의 중앙쯤인 곳에서 수심을 재어보니 570cm였다. 하구둑은 1,841m이며 수문 20개가 군산 쪽에서 출발하여 하구둑 중간까지 이어져 있다. 이로써 금강호 우안, 즉 서천 쪽은 토사가 빠져나가지 못하고 쌓이기만 하여 수심이 고작 1~2m 정도였다.

이 같은 현상은 배수갑문 밖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갑문이 없는 장항 쪽에서 유속이 정지되어 뻘이 차오르고 있는 것이다. 배수갑문 중간 바로 앞에서 잰 수심은 590cm였다.




▲ 쓰레기만 쌓인 어도와 소형선박 통로(오른쪽) 있으나마나 한 어도 “......바닷물과 민물을 오가며 사는 어류를 위해 만든 어도(魚道)에서는 어른 팔뚝만한 숭어들이 뜀을 뛰고......” 군산시청 인터넷사이트에 나오는 금강하구둑 설명의 한 부분이다. 어도를 둘러보았다. 15톤급의 선박이 드나들 수 있는 통선문과 나란히 설치한 어도는 폭이 7~8m 되어보였는데 썰물 때 어쩌다 한번 열어 강물이 바다로 빠져 나갈 뿐 항상 굳게 닫혀 있다고 금강호의 어부 최종영씨가 전해주었다. 농업용수와 공업용수로 쓰자니 짠물의 유입을 막기 위해 어도의 갑문은 닫혀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있으나마나 한 어도 앞에는 쓰레기만 잔뜩 떠다닐 뿐이었다. ▲ 담수이후 강 중앙에 퇴적토가 쌓여 형성된 하중도
▲ 금강대교 아래 하중도에 오른 본지 양수철 발행인 새만금호 희석수 당치 않아 서해안고속도로 금강대교 바로 밑에는 넓은 하중도(河中島)가 형성되어 있다. 그곳에 올랐다. 섬은 온통 갈대숲이었고 그 사이로 환삼덩굴이 진을 치고 있어 안으로 들어가기 어려웠다. 땅을 헤집어보니 진흙이 드러나며 직경 2cm쯤 되어보이는 갈대의 뿌리가 뒤얽혀 있었다. 이 갈대숲은 철새들의 서식지이기도 하지만 영양염류를 흡수하여 수질오염을 막는 역할을 한다. 이러한 하중도는 나포와 웅포 그리고 더 상류로 올라가 용안에도 형성되어 있다.나포양수장 앞에서도 녹조현상은 심했다. 나포양수장은 2001년 완공하여 금강호의 물을 금남정맥을 넘겨 만경강 수역으로 빼내고 있다. 새만금호의 수질을 개선하기 위해 금강호의 물을 희석수로 끌어들이겠다는 계획이 발표된 바 있는데 전문가가 아니라도 가당치 않다는 생각을 했다. 환경부가 발표한 올해 1~7월의 금강호 총인농도는 0.165(mg/L) 5급수 기준치인 0.150을 넘어서고 있다. 우리나라 최대 재첩생산지 옛 백제의 숨결을 느끼게 하는 웅포의 곰개나루를 통해 뭍으로 올라 금강호를 바라보았다. 중선배가 늘어서 있던 포구는 흔적도 찾아볼 수 없었다. 웅포에서 태어나 지금은 이곳에서 매운탕집을 하고 있는 조아무개(51)씨로부터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여기가 우리나라 최대의 재첩생산지였고 최대의 참게 산란장이었습니다.”금강하구둑을 막을 무렵 그는 어촌계장을 하면서 금강하류 양안의 어민들과 함께 보상투쟁을 했다. 하구둑 위에서 최루탄을 맞아가며 받아낸 보상금은 어업면허를 포기한 댓가로 1,200만원, 강 양안에 둑을 쌓아 만든 논에 대한 경작권 3,000평이었다. 어민들은 대부분 이 경작권을 팔아 모두 3,500만원 안팎의 보상금을 받았다. 영산강과 낙동강을 막을 때에도 이러한 보상은 없었다고 최씨가 말했다. 수협에 진 빚을 갚기도 했지만 술, 도박으로 탕진하는 사람도 많았다고 했다. 금강호 지척에 둔 ‘웅포골프장’ 백제 문화유산마저 훼손 ▲ 금강호를 내려다 보는 용왕사와 덕양정
진포대첩 치른 역사 현장

물산이 풍부한 금강 하류 지역은 침략자들에게는 아주 좋은 약탈 대상이었다. 고려말 우왕 6년(서기1380)에 왜구가 500여척이나 되는 대선단을 이끌고 금강을 거슬러 올라왔다. 진포에 상륙하여 민가를 휩쓸고 다녔다.

고려 조정에서는 최무선을 보내 왜구를 무찌르게 했다. 최무선이 이끄는 100여척의 고려 수군은 배에 화포를 싣고 해전을 벌였다. 세계 역사상 최초의 함포해전이었다. 함포의 활약으로 고려 수군은 완벽한 승리를 거두었다.

이를 진포대첩이라 부르는데 용왕사는 이 때 수장된 병사들의 넋을 위로하고 해마다 풍어제를 지내던 곳이었다. 흔적도 없이 사라진 용왕사 터에 최근 사당 1채를 지어 역사의 맥을 잇고 있다.

용왕사 뒤로 함라산에 이르는 산록은 입점리 고분군을 비롯해 고대 문화유산이 땅속에서 숨쉬고 있는 지역이다. 백제 문화유산의 보고인 이 지역이 제대로 조사되지도 못하고 포클레인의 삽날에 유린되고 말았다. 금강호를 지척에 둔 이 일대 76만평을 파헤쳐 민둥산을 만들어 37홀 규모의 웅포골프장이 들어선 것이다. 반경 3km 이내에 있는 모든 가옥들이 벽에 금이 가는 피해를 입었다. 여기에 뿌려질 농약은 곧바로 금강호에 유입될 것이다.

고소득 올려주던 실뱀장어

웅포대교를 향해 거슬러 오르다 장어잡이 어선 한 척을 만났다. 3일에 한번 배수갑문을 여는데 이 때 뱀장어가 수문을 통해 더러 금강호 안으로 들어온다는 것이다. 뱀장어는 강과 바다를 오르내리며 어민들에게 고소득을 올려주는 어족이다.

해마다 봄이 되면 새끼뱀장어(실뱀장어)가 바다에서 거슬러 오고, 가을에는 강에서 성장한 뱀장어가 번식을 위해 먼 바다로 돌아간다.

뱀장어 알과 새끼는 어느 곳에서도 발견되지 않아 오랫동안 뱀장어의 번식은 수수께끼였다. 이 수수께끼는 20세기 초에서야 비로소 풀리게 되었다. 1922년 덴마크의 어류학자 요하네스 슈미트박사는 이동하는 뱀장어를 따라가 서인도제도의 북동쪽에 있는 사르가소 해역에서 부화 직후의 개체를 발견하여 비로소 뱀장어의 번식장소를 알아냈던 것이다. 번식을 위해 무려 5,000km나 이동한 것이다.

우리나라의 뱀장어도 같은 방법에 의해 타이완이나 오끼나와 동쪽 해안이 번식 장소로 여겨지고 있다. 알에서 깬 나뭇잎 모양의 새끼는 프랑크톤으로 살아가다 2∼3년 걸려서 강어귀로 회귀한다.

이때는 이미 8∼10cm 정도 자란 실뱀장어로 변해 있고, 몸은 희고 투명하며 두 눈만 까맣다. 뱀장어의 번식이 이렇듯 신비의 베일에 가려있기 때문에 양식이 어려워 이 시기의 실뱀장어를 양식장에서 가두어 기른다. 이 때문에 양식용 실뱀장어의 가격은 그야말로 금값이다.

하룻밤 사이에 수백만원을 벌기도 했다고 한다. 하구둑이 막히기 전에 금강하류지역에서도‘ 시라시’라 부르는 실뱀장어를 잡아 짭짤한 소득을 올렸는데 1kg에 200~300만원을 받았으며 1kg은 7~8천 마리 정도라고 한다.

   
▲ 금강하류 양안의 모든 지천에 배수펌프장이 있다.
모든 지천에 배수펌프장

하구둑에서 상류로 올라가며 강 양안은 바로 산으로 이어지는 부분을 제외하고는 모두 제방을 쌓았다. 자연하천이 아닌 인공하천으로 바뀐 것이다. 이곳으로 흘러드는 크고 작은 모든 지천에 배수펌프장이 설치되어 있음을 확인하며 상류로 거슬러 올라갔다.
웅포대교 부근부터 강폭이 좁아졌다. 토사가 쌓여 형성된 하중도를 개간하여 농지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좁은 강폭이 웅포대교 부근부터 갑자기 넓어진 것이다. 이로 인해 유속이 갑자기 느려져 토사퇴적이 가장 심한 곳이다.

이곳을 지나면 강 남쪽은 익산시 용안면의 저지대이다. 하포, 상포를 지나며 강경까지 제방으로 이어져 있는데 집중호우 시에 침수가 가장 크게 우려되는 곳이다.

강경까지 가기 어려워   

부여군 임천면 칠산에 이르러 강 남쪽으로 하중도가 있는데 이를 개간하여 논농사를 짓고 있었다. 칠산 배수펌프장을 지나며 강폭은 다시 좁아졌다. 수심을 재어보니 5m가 넘었으며 유속이 빨라졌다. 그런데 갑자기 선외기 뒷부분 스크루에서 흙탕물이 솟구쳤다.

수심을 재어보니 1m 정도이다. 강바닥을 훑고 지나가는 좁은 부분은 수심이 깊고 나머지 부분은 얕은 것이다. 금강하류 곳곳을 손바닥 들여다보듯 하는 최종영 씨도 더 이상 올라가기 어렵다며 난감해 했다. 강경까지 가려던 계획을 취소하고 칠산에서 배를 돌리지 않을 수 없었다.

<글/허정균, 사진/이강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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