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명운동, 민주주의 폐단인가
서명운동, 민주주의 폐단인가
  • 편집국 기자
  • 승인 2006.12.29 00:00
  • 호수 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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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항산단 조기착공을 촉구하는 서명을 해야되니 아주머니들께서는 마을회관으로 나와 주시기 바랍니다” 지난 22일, 어느 마을 이장의 방송내용이 있었다. 두세 번을 반복한 이 방송에서는 ‘아주머니’들만 불러내고 있었다.

확인 결과 아주머니들은 “그냥 해야한다고 해서” 따랐고 “도장은 이장이 갖고 있는 걸로 찍었을 것”이라 했다.   

이런 현상은 우리나라의 민주주의가 여전히 정착되지 못했다는 것을 반증한다. 그래서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지만, ‘국민들의 민주주의를 수용할 만한 의식수준에 달해 있는가’라는 질문에는 선뜻 답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대통령 직선제, 주민감사청구, 주민소환제, 주민예산참여제, 주민자치센터 운영, 주민 조례 제·개정 청구권, 자문위원회, 심의위원회……, 선진민주국가에 뒤지지 않는 민주제도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일반인들은 생소한 것들이 많겠지만 서천군에도 새해에는 대부분의 제도들이 도입될 예정이다.

민주선진국가의 제도들이 시민의식의 발달과 그 요구에 의해 발전했다면, 우리나라처럼 짧은 민주주의 역사를 가진 나라는 주민의식 개혁보다는 제도개혁이 우선해 민주주의 형식 갖추기에 급급했다. 이런 민주문화지체(民主文化遲滯)현상은 주민들이 주인으로서 누리기보다는 지도층들이 민주제도를 이용해 주민들을 여전히 군림하는 수단으로 전락한다.

예컨대, ‘서천군 국책사업 유치활동 지원에 관한 조례’가 제정된 과정을 보면 군의회가 발의하는 것은 주민의견 수렴을 생략할 수 있는 조건을 최대로 이용해 의원들끼리 입만 맞추면 되는 것이었다. 또 조례 내용에는 지원금 집행의 타당성을 검토하고 결정하는 심의위원회를 일반주민을 포함해 만들도록 돼 있다. 그러나 심의위원은 당연직으로 군청 실·과장 서너명, 군의원, 일반주민은 군수가 임명하도록 했다.

모양은 꽤 민주적이나 군의원 1인 빼고는 모두 군수가 좌지우지 할 수 있다. 제도는 주민의 참여를 위한 듯 보이지만, 권력자의 의도대로 조례와 위원회를 움직일 수 있다. 일반인이 참여했다는 포장과 함께 결정에 대한 책임도 심의위원회에 미룰 수 있으니 권력자는 ‘꿩 먹고 알 먹은 사람’이 된다.

제도로 규정된 것은 아니지만, 민주주의에서 ‘주민의 뜻’을 담아내는 수단으로 활용되는 것이 ‘여론조사’와 ‘서명운동’이다.

서천군에서 한참 활용되는 서명운동이 있는데 바로 ‘장항산단 조기착공 촉구 서명운동’이다. 발로 뛰면서 주민의 뜻을 담아내는 가장 기초적인 방식이다. 그러나 지금 서천군에서 벌어지고 있는 서명운동은 발로 뛰는 대신, 정책추진 통로, 전화, 방송 등으로 이뤄진다. 군이 이장단의 협조를 얻어 마을 방송을 하고 영문도 모르는 아주머니들이 ‘해야한다’는 말에 이장에게 맡겨 둔 도장이 이용되고 있다.

이런 서명에 대해 서천군은 민간주도로 실시된 서명운동에 19세 이상 성인 90%이상(4만8천6백여명)이 동참했다고 밝히고 있다. 제도권 밖의 가장 원초적인 민주주의 방식이 권력자의 의도에 의해 남용되고 개인의 명의가 도용되는 현장이 바로 서천군 현실이다.

주민의 민주의식 수준향상보다 앞선 민주제도는 이처럼 악용되는 폐단이 따른다. 이 폐단을 줄이기 위한 방법은 주민 스스로 ‘내가 이 사회의 주인’이라는 생각으로 사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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