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천의 인물- 이훈구 박사
서천의 인물- 이훈구 박사
  • 서남옥 기자
  • 승인 2007.10.12 00:00
  • 호수 38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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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헌의원으로 농정사에 큰 발자취 남겨
▲ 이훈구 박사 사법고시나 서울대합격 축하현수막을 가끔 본다. 아니 별별 축하현수막을 내걸어 알리고 자랑하는 시대다. 그런데 우리고장이 배출한 심당 이훈구 박사를 아는 군민은 많지 않아 안타까운 마음이다.심당은 1896년 4월 26일 기산면 산정리에서 이학규 씨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1924년 동경제국대학 농학부 졸업, 1927년 캔사스주립대 농과대학원 수료, 2년 후에는 위스컨신대학에서 농업경제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중국 금릉대학 농정학과 교수, 숭실전문학교 교수를 역임, 1938~1940년 조선일보 주필 겸 부사장으로 재임했다. 1946년 미군정하에서 농무부장, 1948년 제헌국회의원을 거쳐 단국대학장과 성균관대학총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1960년 초대 참의원 당선, 1961년 6월 13일 대전교도소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심당이 집행위원장을 맡아 개최한 ‘조선특산품전람회“는 연인원 10여 만명의 관객이 몰려 물산장려는 물론 민족의 긍지와 민족혼을 고취시켰다. 또 총독부가 부재지주토지를 수탈하려하자 ‘토지는 소작인의 생활안정을 위하는 데 주목적을 두어야한다’고 사설을 통해 역설했다. 광복 후 토지개혁 전문위원회 위원장을 맡은 심당은 소작인 중심의 농촌개혁 터전을 다졌으며 제헌의원 시절 농지개혁법 입법에 적극 참여, 농정사에 큰 발자취를 남긴다. 현재 심당의 생가에는 동생 형구 씨(71)가 거주하고 있다. 이 씨는 “형님과 나이 차가 많아 어릴 적 기억은 없고 서울에서 2년 남짓 함께 기거한 적이 있다”며 “번듯한 집도 지니지 못하고 적산가옥에서 살았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또 이임 초대법무장관, 장면 박사등과 막역한 사이로 모두 이승만 대통령을 싫어했다고 전했다. ▲ 130년 된 심당의 생가에서 동생 이형구 씨

“천성이 온화하고 청백했으며 다른 사람 험구하는 걸 듣지 못했다”며 큰 조카가 “미국유학 갈 때 단 63달러만 가지고 갔다” 회상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고 말했다.

1961년 5.16군사정변 이후 경찰은 민주사회당원이라는 이유만으로 심당을 서천으로 압송·조사하고 이튿날 새벽 대전으로 이송했다. 동맥경화증을 앓던 심당은 이 일련의 과정에서 심적 부담과 과로로 심장마비를 일으켜 사망했다. 향년 65세의 안타까운 나이였다. 가족들은 심당의 시신을 고향으로 모셔와 장례를 치르고 흥림지 위 선산에 그 유해를 안치했다.

이씨는 “죽음에 이르게 한 군사정권이 원망스럽다. 당시 군부의 시퍼런 서슬이 무서워 이웃이나 일가·친척들이 장례식에 내다보지도 못했다”며 당시의 통분을 쏟아냈다.

그러나 심당의 친일파 논란이 있는게 사실이다. 이에 대해 “형님의 조선일보 재직을 두고 친일 운운하는 것은 언어도단”이라며 “친일한 사람이 그렇게 청빈하게 살았겠느냐” 반문한다.

조선일보를 나온 후 일본경찰을 피해 초야에 묻혀 살았다고 들었다면서 “친일을 하지 않고 절개를 지킨 형님이 자랑스럽고 감사드린다” 말했다. 덧붙여 아버지도 일본에 쌀 공출하는 것이 싫어 100여 마지기 논에 일부러 피농사를 지었다고 한다. 그 아버지의 영향을 받고 자란 형님이 어찌 친일을 했겠느냐는 것.

일제강점기로부터 5.16 군사정변에 이르기까지 근·현대 역동기에 농업전문가, 언론인, 정치가, 교육자였던  심당, 그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심당의 생가 앞에는 심당이 설비했다는 우물에 물이 가득 고이다 못해 흘러넘치고 있었다. 마치 심당의 업적을 잊지 말라 노래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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