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헌의원으로 농정사에 큰 발자취 남겨
“천성이 온화하고 청백했으며 다른 사람 험구하는 걸 듣지 못했다”며 큰 조카가 “미국유학 갈 때 단 63달러만 가지고 갔다” 회상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고 말했다.
1961년 5.16군사정변 이후 경찰은 민주사회당원이라는 이유만으로 심당을 서천으로 압송·조사하고 이튿날 새벽 대전으로 이송했다. 동맥경화증을 앓던 심당은 이 일련의 과정에서 심적 부담과 과로로 심장마비를 일으켜 사망했다. 향년 65세의 안타까운 나이였다. 가족들은 심당의 시신을 고향으로 모셔와 장례를 치르고 흥림지 위 선산에 그 유해를 안치했다.
이씨는 “죽음에 이르게 한 군사정권이 원망스럽다. 당시 군부의 시퍼런 서슬이 무서워 이웃이나 일가·친척들이 장례식에 내다보지도 못했다”며 당시의 통분을 쏟아냈다.
그러나 심당의 친일파 논란이 있는게 사실이다. 이에 대해 “형님의 조선일보 재직을 두고 친일 운운하는 것은 언어도단”이라며 “친일한 사람이 그렇게 청빈하게 살았겠느냐” 반문한다.
조선일보를 나온 후 일본경찰을 피해 초야에 묻혀 살았다고 들었다면서 “친일을 하지 않고 절개를 지킨 형님이 자랑스럽고 감사드린다” 말했다. 덧붙여 아버지도 일본에 쌀 공출하는 것이 싫어 100여 마지기 논에 일부러 피농사를 지었다고 한다. 그 아버지의 영향을 받고 자란 형님이 어찌 친일을 했겠느냐는 것.
일제강점기로부터 5.16 군사정변에 이르기까지 근·현대 역동기에 농업전문가, 언론인, 정치가, 교육자였던 심당, 그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심당의 생가 앞에는 심당이 설비했다는 우물에 물이 가득 고이다 못해 흘러넘치고 있었다. 마치 심당의 업적을 잊지 말라 노래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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