촛불의 미학
촛불의 미학
  • 편집국 기자
  • 승인 2008.07.21 00:00
  • 호수 42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명박 정권이 들어서면서부터 대내외적으로 총체적 난국 상황이다. 대내적인 문제는 차치하고, 북한과의 교류 문제, 미국과의 쇠고기 수입 문제, 일본과의 독도 문제, 중국과 러시아와의 경원시(敬遠視) 된 외교 문제 등을 들 수 있다.

게다가 유가 파동으로 경제 또한 휘청거리고 있다. 따라서 이 정권의 ‘대북 길들이기’나 ‘실용외교’, ‘경제 살리기’ 정책 모두 도마 위에 올라 있다.

이보다 더 가슴 아픈 것은 미국의 눈치를 보며 집권하였던 군사정권 시절에도 느끼지 못한 자주국가에 대한 의문이 깊어져 간다는 것이다.

  ‘쇠고기 협상’은 그 대표적인 예이다. 협상이란 서로 간의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 양보와 타협으로 이루어지는 게임이다. 따라서 협상은 승리자도 패배자도 없게 된다. ‘서로’가 ‘우리’로 변하는 것이라고나 할까?
따라서 서로가 만족하는 협상은 50 : 50의 결과를 낳는 것이다. 이에 비하여 전쟁은 다 갖느냐, 다 빼앗기느냐를 결정하는 게임이다. 아무리 실패한 협상이라도 49 : 51의 선을 넘지 않는 법이다.

그런데 우리의 ‘쇠고기 협상’은 어떠했는가? 49 : 51도 아닌 제로섬 게임이 되어 버렸다. 즉, 우리는 협상이 아닌 전쟁에서 패한 나라가 되고 말았다. 미국의 축산 관계자들은 승리의 노래를 불렀다.
 
 일본에서 개최된 ‘2008 G8 정상회담’에 비회원국 정상으로 참여한 이 대통령은 미국 부시 대통령과의 만남 석상에서 ‘쇠고기 협상 결과 조속 이행’을 다짐받았다. 우리 국민들은 ‘먹으라면 먹어!’ 라고 외치는 힘 센 자에 의해서 울며 겨자를 먹는 꼴이 되었다.
19세기에 전성기를 구가한 제국주의 바람이 21세기에 다시 불어 닥치는 것 같다. 이 신제국주의 속에서 우리 역사는 또 다시 식민지 지배를 받아야 하는가?

 어떤 사람들은 우리나라가 강대국의 틈바구니에 끼여 있기 때문에 자주적 행보가 어렵다고 한다.

기왕에 어느 나라의 영향력을 받는다면, 미국의 영향력을 받는 것이 가장 낫지 않겠느냐는 말에도 서슴없다. 강대국에서 으스대며 살아가지 못하는 약소국민의 슬픔이다. 살아남기 위해서 눈치를 보아야 할 수 밖에 없는 현실이 참 슬프다. 반만년의 유구한 역사 속에서 어찌 보면 가장 부강한 역량을 가지게 된 오늘에 이르러서도 약소국민의 의식에 젖어있는 현실이 더욱 슬프다.

 엘리자베스 1세가 잉글랜드 여왕으로 즉위할 당시의 상황이 우리의 처지보다 좋은 바가 없었다. 에스파냐와 프랑스, 스코틀랜드의 틈바구니에서 신하들도 사분오열되어 있었다

결국 여왕은 ‘국가와 결혼했다.’ 라고 외치면서 결혼 포기 선언을 하였다. 그 때부터 신하들의 단합을 꾀하고, 자주국가로서의 면모를 일신하면서 무적함대 격파, 북아메리카의 식민지화, 동인도회사의 설립 등을 추진하면서 대영제국의 발판을 다지게 되었다.

 11세기 초에 강대국이 된 거란족의 침략을 받게 되자, 고려의 신하들은 ‘나라를 빼앗기더라도 싸워나 보자’는 파와 ‘양계 지역(오늘날의 평안도, 함경도에 해당)을 떼어주고, 그들을 달래자’는 파로 갈라졌다. 그들 모두 싸우기 전에 패배자들이었다.

이 때, 서희가 앞장서서 두 치 혀로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거란을 물리쳤을 뿐만 아니라, 강동6주(오늘날의 평안북도 서안지역)를 회복하였다.

 오늘에 이르러 엘리자베스 1세 같은 지도자가 우리에게는 없는 것일까? 서희와 같은 관료(외교관)를 기대하는 것은 정말 무리일까? 우리 대한민국 국민은 자주국민이고, 세계사에 당당한 나라임을 천명하면 안 될까? 지난 5월 2일부터 비롯된 촛불집회가 반국가적이고, 반정부적인 집회가 아닐 것이다. 우리의 지도자부터 정부 관료들이 먼저 약자의식에 빠지지 말고, 세계사에 당당하게 맞서서 거대한 파도가 밀려와도 당당하게 나아가는 선장이 되고, 조타수가 되어달라는 바람의 불꽃이다.
 
 이 정권에게 바란다. 대한민국 국민임을 자랑스럽게 여길 수 있도록 대통령부터 모든 관료들이, ‘바로 국민 여러분이 나의 주인이오.’ 라는 마음을 가져 달라고……. 촛불은 자신을 태운 눈물의 빛으로 오늘도 호소하고 있다.


 

   
       권기복 칼럼위원

 

 * 칼럼은 본지의 논조와 다를 수도 있습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